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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Jul 13. 2019

볼 빨간 동생


나에게는 9년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어머니가 긴 병 끝에 어렵사리 얻은 아들이라 특히 할머니가 연등같이 받들어 키웠다. 동생은 늘 골골했다. 전쟁 중이라 이리저리 쫓기는 생활을 하다 보니 한창 클 나이에 풍족한 환경을 누리지 못한 탓도 있겠다. 시끄럽고, 말썽 부리고, 나를 조올~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지만, 동생은 뺨과 입술이 유난히 빨간 귀여운 아이였다. 그러나 나는 함께 놀아주고 보살피기보다는 못된 엄마 노릇을 했던 것 같다. 다 큰 후에도 동생은 내가 자기 머리통에 늘 꿀밤을 줬다고 억울해했다. 

14살의 나와 5살 남동생


그 아이가 어느새 70이 넘었다. 머리숱은 듬성하고 긴 허리마저 구부정하다. 그동안 같은 마포구에 살았어도 왕래가 잦지 않았는데, 우리가 아파트를 벗어나 연희동에 집을 지어 이사를 하고 보니 동생이 사는 아파트가 지척이라 뻔질나게 만나게 되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사주팔자를 타고난다고 한다.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웃고 넘겨야 할지 모르겠으나, 돌아가신 할머니는 금쪽같은 손주를 두고 "사모관대를 두 번 쓰긴 하나 장관 벼슬에 오르는 훌륭한 사주를 타고났다"라고 했다. 


설마 했는데 동생은 장가를 두 번 갔다. 혹시나 했는데, 장관은 못 했다. 정치에는 애당초 뜻이 없었고, 대학 졸업하고 곧바로 KBS에 들어가 PD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혼하면서 직장을 관두고 프로덕션을 차려 현재까지도 방송 다큐를 제작하고 있다. 할머니께서 방송국 들어간 것이 장관 자리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우기신다면, 딱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동생이 두 번째 선택한 아내는 미술대학을 나온 부산 토박이다. 인물도 좋고 감수성도 풍부하나 경상도 기질이 은근히 거세서 둘은 티격태격하며 20년 넘게 살고 있다. 동생이라도 성품이 좀 너그러우면 좋으련만, 올케 표현을 빌리면 까칠하고 냉정하고 인정머리가 없단다. 그래도 서로 좋아하니 여태 살겠지 싶어 걱정을 놓고 지냈는데, 갑자기 지난 연말에 올케가 위암 판정을 받았다. 스트레스와 위산과다가 원인이란다. ‘네가 오죽 못되게 굴었으면 네 처가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느냐’고 화살이 동생에게로 쏠렸다. 동생을 나무라는 마음 한구석에 올케를 향한 서운함도 끼어들었다.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라는 것도 알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시시껄렁한 사연이다. 내 뱃속으로 난 자식도 맘대로 안 되는데 몇십 년을 모르고 지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고충이 오죽하랴? 마음이 상한다고 다 위산과다가 되면 어디 세상 무서워 살겠는가?


병원에선 수술을 권했지만 동생 내외는 이상구 박사의 <뉴 스타트센터>가 있는 설악산으로 떠났다. 그곳 외에도 여기저기 좋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7~8개월을 보냈는데 위 벽은 많이 깨끗해졌으나 장과 연결된 곳이 암세포로 막혀 물도 먹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수술을 했다.


암 환자의 심리를 다섯 단계로 구분한 것을 보면 첫 단계가 부정의 시기인데, 두 사람이 병원을 불신하고 대체요법을 찾아 여러 달을 허비한 것으로 그 시기는 지나간 것 같다. 그런데 그 뒤로 가장 힘든 분노의 시기가 드디어 찾아왔는지 올케가 가방 달랑 들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냥 나갔겠는가? 며칠을 길길이 뛰며 동생한테 달려들어 갖은 악담을 퍼부었다는데, 문제는 내 동생이 그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위로하고 감싸줄 위인이 못 된다는 데 있다. 최선을 다한 자기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되레 자기가 먼저 죽을 것 같다며 동생은 한참 난리를 부렸다. 


올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강제로 붙잡아 와야 할지 나로선 판단이 안 섰다. 환자의 협조 없이 치료가 가능하긴 한 걸까? 친정아버지의 3년 투병도 지켜봤고, 여동생 한 명도 암으로 먼저 보낸 전력이 있건만, 남동생 일은 투병뿐만이 아니라 부부 문제까지 얽혀 있으니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내가 나댈 수도 없었다. 


결국 세 번째 찾아온다는 타협의 시기가 왔고, 동생은 아내를 찾아가 그녀가 선택한 방식을 존중해 지리산 커뮤니티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적극적으로 다시 치료를 도왔다. 올케는 자신의 상태를 수용한 듯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동생은 이후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듯 보였다. 느닷없이 하루 집에 들렀는데, 밥을 주랴해도 마다하고 밖에 나가 맛있는 것 사주랴 해도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그러고는 제 가슴을 손으로 가리키며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는 게 뭔지..." 동생이 읊조렸다. 그러더니 서울의 집도 부동산에 내놓았다 하고, 회사도 규모를 반으로 줄이고, 앞으로의 계획도 분명하지 않은 채, 어느 날부터인가 소식마저 끊었다. 이 쪽에서 연락을 하면 어쩐지 피하는 것만 같았다. 환자는 마지막 단계인 수용 상태에 들어 심신을 회복 중인데, 간병인이 도리어 심각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밖이 어두워지니 동생이 저녁밥을 먹었는지 애가 탄다. 머리 허연 동생을 아직도 볼 빨간 어린 동생으로 착각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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