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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퀘스트 Mar 29. 2019

무슨 말이 필요해 | 봉태규 에세이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


결혼을 하고 난 후 가장 큰 고민은 이거였다.


‘과연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원지와 결혼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반드시 아버지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시의 내 감정과 마음은 원지 한 사람만으로도 용량이 초과한 상태라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수가 없긴 했다. 그러다 임신 소식을 듣게 되었고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될 준비를 하였다.


엉뚱하지만 아이를 안으려면 팔뚝이 두꺼워야겠다 싶어 팔 운동을 열심히 했으며 지금보다 중후한 목소리를 내야 아이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음. 아.” 하며 낮은 목소리 톤을 연습하기도 했다. 모두 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책도 엄청나게 찾아서 읽었다. 유럽식 육아나 자녀교육법을 다룬 책은 다 훑어보았는데 프랑스 육아법은 요긴하게 써먹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리나라의 현실과 맞지 않아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유럽에서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오랜 기간 교육하고 쌓아온 만큼 남다른 부분이 많았고 아직까지도 감명 깊게 남아 있다. 아이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신뢰하며 아껴준다는 자세는 내가 아버지가 된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시하가 태어나고 가장 먼저 담당 간호사에게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뭔가 움찔하며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선택에 놓였다. 예방 접종을 위한 주사기 선택이었다. 하나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어 많이들 사용하는 주사기, 다른 하나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10만 원 가까이하는 주사기였다.


10만 원짜리 주사기는 필터가 있어 유리 앰풀을 부러뜨렸을 때 혹시라도 섞일지 모르는 이물질을 걸러준다고 했다. 간호사는 나를 연신 ‘아버님’이라 부르며 친절하게 부연설명도 해주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셔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에 유리 앰풀에서 미세하게 유리 가루가 들어가는 사고가 있어서요. 또 그럴 확률은 매우 작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물론 그냥 주사기 쓰셔도 대부분은 이상 없습니다. 선택은 보호자이신 아버님이 하시면 됩니다.”


‘좋다는 이유에 현혹되어 장난감을 너무 쉽게 사주지 말아야지. 아이는 금방 자라니 옷가지들은 저렴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걸로 선택해야지. 비싼 걸 사면 아주 큰 사이즈를 사서 한참 동안 입히고 또 입혀야지. 속물이 되지 말자. 그런 모습을 가장 경계하자.’


어떤 아버지가 될지 고민했던 내용이다. 우리나라는 사는 지역이나 주거 공간으로 계급이 나뉘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고민이었다. 금전적인 부분에 사람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아이 앞에서는 금전적인 부분에 연연하는 모습을 절대 안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당연히 자신은 없었다. 나는 이미 사회에 길들여진 인간이라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이상에 가까웠다.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아버지에 가까워지려면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주사기를 선택하는 게 맞다. 간호사 말대로 대부분 이상이 없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의료보험료 내는 혜택을 받아야지. 머릿속에서는 이게 맞는다고 수백 번 메아리치며 온몸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혹시’라는 아주 작은 불안이 나를 망설이게 하였다.


‘그래, 태어나서 처음 맞는 주사인데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시하를 불안하게 할 수 없지. 그래, 처음인데…….’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주사기를 선택하였다. 아이를 신생아실에 맡기고 원지를 보러 가는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안전의 문제를 고려한 결정이 아니라 내 능력을 시험하는 평가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되었으니 이 정도 금액은 감당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는 것 같은 이상한 속상함이 작지만 무거운 추가 되어 마음에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열심히 사시는 부모님의 수고와는 별개로 나는 항상 부족하고 아쉬운 게 많았다. 운동화가 한 켤레밖에 없어서 일 년 내내 비에 젖든 더러워지든 밑창이 다 떨어질 때까지 그것만 신어야 하는 것이 너무 지루하고 지쳤다. 우리 부모님은 어릴 때 자주 아팠던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어떤 기분을 느끼셨을까?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고열이 나 급하게 응급실에 실려 갔던 것이다. 전에도 여러 번 방문했던 종합병원이라 내 차트를 확인하던 의사가 혹시 모른다며 백혈병 검사를 권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멍하니 계셨는데 그 때 의사가 선택 거리를 던져주었다.


“아버님, 여기는 응급실이라 병원비가 더 많이 나옵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것도 있고요. 아드님이 너무 자주 아파서 검사를 권해드리는데 물론 백혈병이 아닐 수도 있어요. 부담이 되시면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내일 아침에 일반 진료로 검사를 예약하셔도 됩니다. 시간은 더 걸리지만 보험이 돼서 부담이 덜 하실 거예요.”


고민을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까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 응급실에서 백혈병 검사를 했고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열이 나는 내 머리통을 연신 쓰다듬어주셨다. 그 마음이 어땠는지 이제 짐작이 간다. 당시 아버지 형편에 분명 부담이 되는 진료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감정이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를 지불해도 내 아이가 건강하고 아버지인 내가 보살펴줄 수 있다는 안도감 말이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원지와 시하를 보기 위해 병원에 오셨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온 가족이 곤히 잠들어 있는 시하를 경이로움을 담아 쳐다보고 있었다. 장모님께서 나에게 ‘아빠가 한 번 불러보라’고 재촉하신다. 쑥스럽기도 하고 입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아주 어렵게 “시하야…….” 하고 불러봤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불러보라는 장모님 말씀에 “시하야, 아빠야.” 하고 다시 한 번 불렀다. 신기하게도 끔뻑이면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빠야, 아빠. 시하야, 내가 아빠야.”

그래, 이거면 충분하구나.



■ 봉태규 에세이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 중에서 읽어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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