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무력함을 내세워 타인을 통제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폭군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눈에 잘 띄지 않는 유형의 통제도 있다. 특히 자신의 무력함을 내세워 타인을 통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극도로 의존적이고 무능한 것 같지만 타인을 자기 뜻대로 쥐락펴락하려는 환상을 은연중에 갖고 있다. 무력한 행동을 보이면 다른 사람에게 양육자 역할을 떠맡길 수 있고 그들을 조종해 감정적이든 금전적이든 필요한 도움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믿는다.
극도로 의존적이고 무력해 보이는 사람도 남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만큼이나 남에게 의존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양쪽 모두 의존성을 방어하지만 방법이 서로 다르다. 한쪽은 적극적인 통제를 시도하고 다른 한쪽은 남을 조종해서 통제하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도를 한다. 거의 아기처럼 아무것도 자기 혼자 못하는 듯 보이는 사람은 남들을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다고 무의식중에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력함을 내세워 남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이 사실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람이 사소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드라마 같은 사건을 일으킨다. 집안일을 하기로 약속해놓고 다른 누군가가 그걸 대신해주지 않을까 하는 비밀스러운(그리고 아마도 무의식적인) 희망 때문에 ‘잊은’ 적이 있는가?
일을 미루는 버릇에도 이와 똑같은 역학이 숨어 있다.
최대한 일을 질질 끌면서 다른 사람이 해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곧 닥칠 금전적 위기를 오랫동안 무시하다가 막상 신경 써야 할 때가 되면 부모님에게 손을 벌린 적이 있는가? 집을 늘 지저분하게 해놓고 사는 사람은 계속 버티다 보면 어머니 혹은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청소해주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보이는 무력함 이면에는 자신이 남에게 의존하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고 은밀하게 남들을 통제하려는 환상이 숨어 있다.
위와 같이 보호본능을 자극해서 남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는 사람들은 ‘의존하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로 ‘은밀한 통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방어기제는 무의식에 담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감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작동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의식에서 몰아낸다.
방어기제는 심리적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또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너무 단단하게 굳어져 버리면 감정적으로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삶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어떤 방어기제가 작동 중이라는 걸 의식하고 나면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장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반응을 계속 따를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위해 싸울 것인가.
변하고 싶다면 힘겨운 진실을 받아들이고 일정한 정신적 습관을 길러야 한다. 방어기제를 인지한다고 해서 그게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방어기제와 씨름하는 건 끊임없는 도전이다.
내 내담자인 김지영씨는 한 대기업 부회장의 비서로 수년간 일한 중년 여성이다. 지영씨는 아주 지적이고 책임감 있었지만, 상관이 평소에 부하 직원에게 넘겨주던 좀 더 어려운 일을 자신에게 주면 제대로 끝내기 힘들어했다. 상관은 지영씨의 엄청난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것을 키워주려 했다.
지영씨와 나는 그녀가 그 과제를 잘 끝내지 못하는 이유를 파고들었다. 그런 일을 하나 맡으면, 지영씨는 중요한 쟁점을 명확하게 파악 하지 못하고 자질구레한 사항에 집착해 수렁에 빠져버렸다. 복잡한 숫자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업무였는데, 수학은 평생 그녀의 발목을 잡아온 과목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그 과제가 그녀에게 분노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는 책임질 일이 늘어난 것을 원망했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결정을 내리거나 힘들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동적인 마음가짐으로 업무에 임하다 보니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것이다.
이 수동성은 그녀의 성격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0대 후 반부터 지영씨는 교사나 멘토들에게 애착을 갖고, 그들이 그녀를 돌봐 주거나 그녀 대신 생각해주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갈망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돈이나 인간관계와 관련된 결정을 남편에게 맡겼다. 환상 속에서 그녀는 정력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환상에서 깨고 나면 책임져야 할 일들이 쌓여 있어 화가 났다.
지영씨는 심리치료를 통해 이룬 발전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 도움에 덜 의지하고 자신이 배운 것을 잘 이용하게 되면서 변화의 조짐이 보일 때마다 지영씨는 분개했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돌보기를 거부하면서 수동적인 자아로 돌아가, 언제까지나 내 ‘아이’로 남으려 했다. 지영씨는 자신이 평생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고집을 피웠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아주 무력해 보였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을 은밀히 조종해 자기가 싫어하는 정신노동을 남들에게 떠넘기려고 했다. 앞서 말한 ‘은밀한 통제’다.
그녀는 상담사인 나를 아주 이상화 하면서, 내가 자기 대신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할 일을 알려주기를 기대했다. 심리치료에 열심히 임했지만, 실은 자기가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내가 모든 걸 ‘고쳐주리라’ 생각하며 수동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우리의 지속적인 노력 덕분에 지영씨는 이런 수동성 때문에 자신이 치르고 있는 대가를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지영씨는 50대 중반이었고, 시간은 흐르고 기회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하고 싶지 않아서 이제껏 피해왔던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금융 소프트웨어를 독학하고 가계 관리를 맡았다. 그런 다음, 좀 더 어려운 업무에 도움이 될 회계 강좌에 등록했다. 가정에서는 부부의 사교생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시에 그의 수동성을 부추겼던 환상적인 인생에 대한 공상을 줄이려 애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영씨는 힘겨운 노력을 통해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훨씬 더 유능한 사람이 됐다. 그 결과 자신도 깜짝 놀랄 만한 감정을 많이 느꼈다. 과거에 그랬듯이 현실과 마주하면 분노를 느낄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뜻밖에 슬픔과 상실감도 함께 몰려왔다. 지영씨는 자신의 이런 노력이 자랑스러웠지만 자신이 제대로 마음을 쏟으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잠재력을 깨닫고 나자 소극적으로 헛되이 보낸 세월이 자연스레 안타까워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기대지 않고 타고난 지능을 발휘했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너무 오랫동안 너무 깊숙이 자리 잡은 방어기제는 우리 인생과 감정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것을 멈추면 잃어버린 시간, 놓친 기회, 실패한 인간관계를 슬퍼해야 할지도 모른다. 방어기제를 해체하는 일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
▷ 해당 글의 김지영 사례는 『마음의 문을 닫고 숨어버린 나에게』 도서의 일부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 『마음의 문을 닫고 숨어버린 나에게』, 조지프 버고 지음, 더퀘스트 | 읽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