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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기드문소년 Dec 02. 2015

절주 장려 스릴러

폴라 호킨스 <걸 온 더 트레인>

여기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여자가 있습니다. 레이첼은 전남편과의 이혼 후 충격으로 인해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렸고, 그로인해 직장까지 잃었죠. 얹혀 사는 룸메이트에게 자신의 실직을 알리는게 부끄러워서 매일 아침 런던으로 향하는 통근 기차를 타고, 저녁이 되면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합니다. 물론 기차에서도 술병은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답니다.


레이첼의 유일한 낙은 하루 두 번,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행복한 커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녀는 벌써 1년이 넘게 완벽해 보이는 한 쌍의 남녀를 지켜봐왔고, 그들에게 제스와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레이첼은 평소와 다름없이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 제스가 다른 남자와 진한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 레이첼은 자신이 매일 아침마다 보는 그 여인의 사진이 실린 실종 사건 기사를 보게 됩니다.





간만에 꽤 괜찮은 스릴러 소설을 읽었어요. 지인의 추천으로 봤는데, 최근 발간된 책이라 광고도 엄청 나오더군요. 사실 추천을 받을 때, 살짝 야하다는 얘기도 귀뜸 받아서 매우 기대했는데, 개뿔. 그런거 없습니다. 야한 장면이 나온다기 보다는 성인 타게팅 소설이다 보니 표현에 제약이 없다는 느낌이랄까요.

아쉽게도 기대만큼 야하지는 않지만 『걸 온 더 트레인』은 흥미진진한 스릴러임은 확실합니다.


이 책은 챕터가 바뀔 때마다 화자도 바뀝니다. 그래서 각 챕터의 이름은 그 챕터에서의 화자인 셈이죠. 이 책을 읽을 때, 초반에 몰입도 잘 안되고 헷갈렸다고 하셨던 분이 주변에 몇 분 셨는데, 아마 화자가 수시로 바뀐다는 점이 책으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네요.


소설의 화자는 총 세 명입니다.

레이첼, 메건, 애나.


줄거리 소개에서도 언급드렸다시피 레이첼은 전남편과의 이혼 후 트라우마로 인해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렸죠. 매일 같이 술독에 빠져서 거의 폐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는 당일에도 레이첼은 술을 너무 많이 퍼마신 나머지 중요한 단서를 목격하고도 필름이 끊겨서 기억하지 못하죠. 소설은 레이첼이 그날 밤에 끊긴 필름을 다시 복구하고자 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메건은 당돌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에요. 하지만 밝은 외면과는 달리, 숨기고 싶은 과거와 어두운 내면세계를 갖고 있죠. 결국 그녀는 자신의 딥하고 다크한 내면으로 인해 파국을 맞고 맙니다.


애나레이첼의 전남편인 톰이 레이첼과 이혼한 후에 재혼한 상대입니다. 술만 마셨다하면 집으로 찾아와 깽판을 치는 레이첼을 무척이나 증오하죠. 저 같아도 남편의 전부인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 집앞으로 찾아와 땡깡을 부린다면 그 여자를 죽여버리고 싶어질 것 같네요. 하지만 애나는 어느 순간 레이첼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합니다.



페르낭 레제 <세 여인>, 1927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읽는 건 조금 힘들어요. 작품이 재미없다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고요,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굉장한 심리상태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서 소개한 세 여인들은 모두 다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등장하는 장면마다 신경쇠약이 의심될 정도로 강박증과 집착증의 증상들을 보이고 있고요, 각 인물들마다 감정에 날을 세운듯한 날카로운 심리 묘사가 독자들을 숨막히게 하죠.

줄거리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박을 느끼게하는 묘사 때문에 두 번 읽으라면 못 읽을 것 같네요.


레이첼은 전형적인 피해망상증을 보이고 있으며 자기자신을 심리적으로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쓰레기처럼 볼거라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또 술을 먹고, 또 자괴감에 빠지고... 이렇게 반복해서 자신을 헤어나올 길이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넣습니다.


메건애나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데요, 이 여인들은 닮은 점이 많아요. 특히 '아이'라는 것에 의해 세 명이 연결됩니다.

레이첼은 전남편인 톰과의 사이에서 간절하게 아이를 원했지만 그 욕구는 번번히 좌절되고 말았죠. 아마 그때부터 그녀는 자학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겁니다.

메건은 과거에 실수로 아이를 잃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에 자기가 사랑했던 오빠를 잃기도 했고요, 아이를 잃고 나서는 남편마저도 그녀를 떠났어요. 결국 자신의 아들에 대한 상실감은 그녀의 인생 전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나레이첼과 톰이 갖지 못했던 아이를 가지고 행복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레이첼은 그 모습을 보고 엄청난 박탈감을 느끼죠.





이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관음'이라는 소재를 다룬 예술 작품 중에 <이창>의 영향을 안 받은 작품이 어디있을까 싶긴하네요.


<이창>은 관음을 통한 인간 내면의 추악한 본능, 관음이란 병적인 증상을 문제시하는 건전한 선도형 영화가 아니다. 관음을 통해서 관객과 두뇌 싸움을 하는 앞집의 미스테리를 던져주고 풀어가는 히치콕의 일급 스릴러물이다. <인 더 하우스>와 같이 집을 세밀히 들여다보면서 따분한 일상 속에서 엄청난 소재를 발굴하고 상상해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앞집은 적당한 고민과 적당한 행복을 갖고 있는 집들이다. 낮에는 아이들의 노랫 소리가 들리고 춤을 추고 베란다에서 평온히 낮잠을 자고 행복한 신혼 커플도 보인다. 하지만 밤이 되자 외로운에 시달리는 여성, 웃음을 팔고 살아가는 무용수, 술취해서 고뇌하는 작곡가 등 모든 집들은 사연을 갖고 있고 걱정거리를 안고 있다. <이창>은 평온해 보이는 가정을 낱낱히 파고들어갔을 때 항상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을 극단적으로 쏜월드의 집을 무대로 펼쳐보인다.       

[출처] [이창] Rear Window (1954) : 히치콕의 관음을 소재로 한 걸작 스릴러|작성자 스카이워커



『걸 온 더 트레인』 역시 <이창>과 마찬가지로 관음을 통해 사건을 전개해 나갑니다. 하지만 『걸 온 더 트레인』과 <이창>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목격의 과정이 <이창>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불분명하고 흐릿하다는 거죠. 레이첼은 시속 80km/h로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차창 밖의 인물들을 관찰합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관심가는 장면이라도 시간을 들여서 주의깊게 관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주변의 풍경처럼 금새 지나가버리고 말죠. 게다가 그녀는 사건의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장면을 목격할 당시 술에 만취해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것을 기억해내려 아무리 애를 써봐도 결국은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어요.

저는 이 모습을 통해 정처없이 이동하고, 불안정하게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흐린 기억 속에서 한가닥 실마리를 잡으려고 발버둥치는 레이첼의 모습은 현대인의 불안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어요. 저는 작가가 이러한 요소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소설의 주요 배경을 기차 안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기차에 몸을 실은 것처럼 다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죠.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걸 온 더 트레인』은 <이창>의 훌륭한 현대적 재해석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불안의 근원을 너무 간편하게 정의했어요. 불안정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그 탓을 너무나도 손쉽게 남성에게 돌렸던거죠. 더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자세히는 적지 못하겠습니다만, 현대 여성들의 불안의 근원은 남성에게 있다는 식으로 소설이 마무리 된 것 같아 조금 아쉬웠습니다. '결국 여성의 적은 남성이다'라는 명제를 일반화시킨 느낌이랄까요.


하긴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습니까. 스릴러 소설을 읽는데 무슨 많은 생각이 필요하겠어요.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걸 온 더 트레인』은 재미있는 스릴러 소설입니다. 최소한 읽는 동안에는요. 일단 일회독은 추천 드립니다. 그 이상은 정신건강에 해로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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