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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소년
By 보기드문소년 . Nov 30. 2015

용이 될 수 있었던 이무기

하퍼 리 <파수꾼>

저는 지금 엄청나게 찝찝합니다. 최고급 코스요리를 맛있게 먹었는데, 마지막에 나온 디저트가 와사비 아이스크림일 때의 황당함 같은 걸 느끼고 있어요. 다들 이 소설의 책장을 덮었을 때,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앵무새 죽이기』 서평에서 언급했듯이, 『파수꾼』은 하퍼 리의 최신작입니다. 최신작이라고 해봤자 그 이전까지는 단 한 권의 책만 발표되었을 뿐이긴 합니다만... 그 한 권의 파급력은 그야말로 엄청났죠.


하퍼 리는 서른 두 살이 되던 해 『파수꾼』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J.B.리핀코트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가죠. 편집자들은 그 원고를 높게 평가하고는 하퍼 리를 만나서 작품에 대해 논의하는데요, 편집자들 중 하퍼 리를 담당하게 된 테이 호호프라는 60대 여성이 하퍼 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1950년대 후반 인종차별 문제로 들끓던 미국사회에서 『파수꾼』과 같은 작품을 발표하여 논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어린 아이의 관점에서 한번 이 문제를 다뤄보는건 어떻겠냐는 거였죠. 하퍼 리는 다시 골방으로 돌아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3년 뒤 『앵무새 죽이기』가 출간됩니다.


결국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작이자, 전작인거죠.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여지긴 했지만, 55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출판되었구요, 소설의 내용상으로도 약 20여년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올해 초 『파수꾼』이 출판된다고 했을 때, 전세계 독자들의 관심은 온통 이 책에 쏠렸어요. 『앵무새 죽이기』는 작가의 생전에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입니다. 평생 그 책 한 권만 내놓고는 잠적해서 조용히 살고 있던 작가의 후속작이 50년이 지나서 발표된다고 하니... 다들 흥분할 수 밖에요.


출판사에서도 유난이었습니다. 『파수꾼』의 저작권을 가진 영국 하퍼콜린스 출판사는 이 책의 국내 판권을 따낸 열린책들에게 전무후무한 요구를 했었는데요, 바로 금고를 설치하여 원고를 보관하면서 번역 작업을 진행하라는 것이었죠. 또, 보안각서를 쓴 사람에 한해서만 번역 작업물 열람을 가능하게 했고, 그 각서 역시 최소한의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어요.


결국 이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파수꾼』은 2015년 7월 14일, 전세계 동시출간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한 달 전에 이 책을 예약구매하고는, 기저귀를 갈아차고, 오매불망 택배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죠.



7월 14일, <파수꾼>을 읽으며 서점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행렬



『파수꾼』은 발매 전 미리 소개된 줄거리만으로도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전작에서 '정의의 화신'으로 표현됐던 애티커스 핀치가 변절한다는 내용 때문이었죠. 저 역시 처음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닥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애티커스가 올곧은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주길 내심 바랬어요.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제게도 애티커스 핀치는 존경의 대상이자 롤모델이었거든요. 『앵무새 죽이기』를 읽으면서 애티커스 핀치에게 많이 감정이입을 하기도 했구요. 그래서 그의 변절 소식에 많이 불안했고,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설에 대한 흥미도는 더 높아졌죠.



다행히도, 걱정과는 달리 『앵무새 죽이기』 못지 않게 『파수꾼』 역시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소설 초반부(약 150 페이지 부분)에 주인공 진 루이즈 핀치(『앵무새 죽이기』의 스카웃)가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의 변절을 두 눈으로 확인할 때의 그 긴장감이란! 읽고 있는 페이지를 아직 다 보지도 못했는데,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서둘러 책장을 넘기기도 했죠. 그리고는 뒤로 되돌아와서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려고 노력했네요. 그 외에도 소설의 전반적인 줄거리 역시 아주 흥미진진 합니다.



『파수꾼』을 읽고 있는 보기드문소년의 모습



하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소설이 마음에 쏙 들진 않아요...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진 루이즈의 중2병 돋는 독백.

알렉산드라에는 취미로 그림 그리는 사람과 화가, 취미로 글 쓰는 사람과 작가 사이에 혐오스럽고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해변에 경치 좋은 곳이 많아, 주말에는 일할 필요도 없을 거야.」
여호와 하나님. 제가 거의 제정신이 아닐 때 습격을 받아 고모가 제 인생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나이다. 고모는 아버지와 남매간인데도 어찌하여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나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수 있나이까? 오, 주여, 왜 알렉산드라 고모에게 알아듣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방언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나이까? 「고모, 남에게 뭘 해라 마라 하는 건 쉬워요…….」

p. 49
「이제 됐으니 그만해, 진 루이즈.」
이제 됐으니 그만해, 아버지를 믿던 시절에 그가 사용하던 일반적인 정숙 명령어. 그렇게 나를 죽인 것도 모자라 죽은 걸 비틀어…… 어떻게 나를 그렇게 조롱할 수 있지? 어떻게 나를 그렇게 취급할 수 있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나를 여기서 데려가 주세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나를 데려가 주세요…….

p. 358


이런 식의 진 루이즈의 독백? 푸념? 과 같은 문장이 자주 나오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들을 읽기가 조금 힘이 들더군요. 명확하게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하겠으나, 이 독백들을 읽다보면 손발과 함께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어요.

좌절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오, 하나님 저를 데려가주세요~' 내지는 '여호와여, 저들은 아무 것도 모르나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긴 하잖아요? 문체가 너무 옛스럽고 오바스럽다고나 할까요.



독백 중인 진 루이즈 핀치(25세, 무직)



둘째, 진 루이즈의 뭔지 모를 인용.

그녀는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카누 접전>이 발생한 곳이 그 위였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샘 데일은 인디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레드이글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명이 솟아난 언덕과
        그것이 향해 흐르는 바다를.

「뭐라 그랬어?」 헨리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감상에 젖어서.」 그녀가 말했다.

p. 111
뒤에서 <그 모양으로 읍내에 가면 어떡해>라는 알렉산드라의 외침이 울렸다. 진 루이즈는 달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동차가 차고에 있고, 자동차 열쇠가 현관 탁자에 있다는 것을 잊었다. 그녀는 머릿속을 관통하는, 반복적 운율의 부조리한 시구에 보조를 맞춰 신속하게 걸었다.

곤란한 상황이야!
나와 당신 결혼한다면,
당신 죽을 시간 됐을 때
당신이 예뻐한 처녀도
도살되어야 한다니!
곤란한 상황이야!

p. 148


진 루이즈가 독백을 자주 한다고 했죠?

진 루이즈는 인용도 자주 합니다. 보고 있으면 아주 그냥 인용킹이에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시조 읊듯이, 진 루이즈는 고전문헌의 문구를 자유자재로 인용합니다. 이쯤되면 걸어다니는 인용구 사전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죠.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체감상으로는 약 다섯 페이지에 한 번씩 인용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1950년대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 뿐만 아니라, 인용구를 많이 외워두는 게 유행이었나봐요.

문제는 이 인용구들이 소설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과 별 관련이 없는데도 뜬금없이 인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는거죠. 설사 관련이 있다 해도, 이 문장들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연결될까말까 해요.

제 생각에는 이 인용구들이 '그냥 있어보이려고' 삽입된 거 같은데, 그게 쓸데 없이 너무 많아요. '굳이 이 많은 인용구들을 소설 속에 넣었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이 드네요. 개인적으로는 진 루이즈의 독백만큼이나 소설 속 인용구들이 보기에 매우 불편했습니다.



인용킹 진 루이즈 핀치(25세, 무직)



셋째, 어이 없는 결말.

네... 사실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결점은 그냥 허허 웃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겁니다. 제 마음에 안들어서 그냥 투정부린 거에요. 저한테는 이 소설의 문체가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보편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는 제 취향이 너무 까탈스러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진심으로 저를 빡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도 빡칠만하다고 감히 예상해 봅니다. 이 소설은 진짜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 거였어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드릴게요.




※ 아래 부분부터는 소설의 결말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않는 분들은 책을 다 보신 후에 다음 내용을 읽어주세요 ^^




후반부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진 루이즈 핀치는 자신의 아버지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며 논쟁을 펼칩니다. 애티커스가 나름의 논리성을 갖추고 차분히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에 반해 진 루이즈는 거기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도 못해요. 그녀는 단지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수긍할 수 없는 의견에 대해 분노할 뿐이죠. 하지만 독자들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애티커스의 주장이 궤변임을 알 수 있고, 그 의견에 반박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무력하게 패배합니다. 애티커스의 그 되도 않는 궤변에 말이죠.


그 다음에 진 루이즈가 취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도망치는 겁니다. 냅다 집으로 뛰어와 짐을 싸서 뉴욕으로 떠나려하죠.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삼촌이자 애티커스의 동생인 잭이 그녀를 막아세웁니다. 그리고 그녀와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잭이 말하기를, 진 루이즈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 정의롭기만 했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성인이 된 현 시점까지도 그 영향력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거랍니다. 그래서 애티커스는 진 루이즈가 자신의 신화를 깨고, 자신의 세계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의 본모습을 밑바닥까지 보여주기로 결심했답니다.

진 루이즈는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잭 삼촌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었죠. 잭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고.



과연 소설은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요?

그녀는 삼촌과의 대화 직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합니다. 아버지를 찾아가서 화해를 하는거죠.

저는 그녀가 아버지와 화해하기 직전 부분, 즉 삼촌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까지는 정말 흥미진진하게 소설을 읽었어요. 진 루이즈가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분노하고 도망치려고 하는 장면에서는 '저게 무슨 파수꾼이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비웃기도 했고요, 삼촌과 대화를 하며 아버지의 그늘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아~ 이래서 아버지와의 다툼 장면이 필요했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아버지와의 화해 장면은 이 소설이 이야기를 진행하며 쌓아왔던 모든 것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앵무새 죽이기』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룬 소설이라면, 『파수꾼』은 세대 갈등 속에서 현 세대가 지켜나가야 할 가치와 자세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죠.

그런데 소설의 결론은 기성 세대와의 화해한 후, 현 세대로서 나름의 가치를 지켜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제목은 '파수꾼'인데요, 진 루이즈 핀치는 전혀 파수꾼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않고 있어요. 이 소설은 투쟁이 아닌 타협을 다루고 있고요, 파수꾼이 아닌 중재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정쩡합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완벽한 독립도 아니고, 그렇다고 포용도 아니고... 지극히 현실타협적이에요. 각 세대를 아우르겠다는 안전한 방법을 선택한거죠.


차라리 이 소설의 결말이 아버지를 살해하고(사상적인 영역에서 아버지를 철저히 부정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올곧게 지켜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저는 이 소설을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작에 어울리는 '격'을 가진 소설이라고 기꺼이 인정했을 거에요.


소설의 마지막 장인 19장은 단 4페이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네쪽으로 인해 소설의 품격은 천지차이가 나게 되죠. 전형적인 소설계의 용두사미라고나 할까요. 아니, 용두사미라기 보다는 머리, 몸통을 포함한 모든 부분이 완벽한 용의 모습이었지만, 꼬리 끝부분만 요상한 형태를 취하게 된 나머지 아깝게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같은 소설이에요. 기세좋게 하늘로 치솟았다가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 땅 밑으로 곤두박질 쳐버렸죠.



9회말 2아웃을 소홀히 한 결과



어쩌다보니 이 소설을 좀 격렬하게 까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네요. 하지만 다들 알고계시죠? 이게 다 애정이 있어서 까는 겁니다. 기대가 너무 컸던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아요.

『파수꾼』은 훌륭한 소설입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요.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식도 생각해 볼만한 점이 많구요. 다만 그것의 결론이 제 생각과 달라서 많이 실망하고 분노했던 것 같아요. (결국 제 취향의 문제였네요.)


서평을 쓰면서 어설픈 평론가 흉내는 내지 말자고 다짐했었지만, 이번엔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훌륭한 소설의 조건을 말해볼게요.

위대한 소설은 현실에 기반하는 동시에 현실을 극복하고, 때로는 현실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텍스트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야 합니다. 안정이 아닌 진보, 발전을 택해야 하구요.

파수꾼은 현실을 뛰어넘지 못했고, 텍스트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분명했으며, 진보보다는 타협을 택한 소설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앵무새 죽이기』만큼 훌륭한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겠네요.




+ 덧 1

이 소설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작으로써 이 책을 평가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다음으로는 『파수꾼』이라는 독립적인 텍스트 자체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애초에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를 고려하지 않고, 그 이전에 쓰여진 작품이니까요.

이를테면 『파수꾼』에서 쓸데 없이 많이 보이는 과거회상 장면도 『앵무새 죽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는 소설 속 인물의 심리묘사와 배경설명을 위해서 꼭 필요했었던 부분이었겠죠. 그렇지 않고서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성장과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을테니까요.


+ 덧 2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사실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 이후에 한 권의 책을 더 기획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핀치 가문 3부작이었던거죠.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 본다면, 아마 그 3부작의 마지막 소설은 진 루이즈 핀치의 오빠, 젬의 죽음을 다루었을 수도 있을거 같아요. 그렇다면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 사이의 사건을 다루는 소설이었겠죠?


+ 덧 3

만약 두 소설을 모두 안 읽어보셨다면 『앵무새 죽이기』를 먼저 읽으시고, 『파수꾼』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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