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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기드문소년 Oct 28. 2015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인간에게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 있나요? 타인의 죽음 말고, 당신 자신, 본인의 죽음 말이에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장례식에 가야될 일이 많아지더군요. 지난주만 해도 퇴근 직후 대구로 조문을 갔다가 육개장 한 그릇만 먹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타인의 죽음을 종종 접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과 자세도 예전과는 달라지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접하고 있습니다. 영화, 문학, 미술, 음악 등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죽음은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하는 소재입니다.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 1885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주변의 죽음을 많이 접하긴 했어도 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아니, 딱 한 번, 그랬던 적이 있었네요.

교과서에서 그러잖아요. 사춘기 때는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한다고, 즉 '자아성찰'을 하는 시기라고요. 헌데 저는 안 그랬어요. 그 시절 제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죠. 하지만, '죽음'에 관해서는 유난히 호기심이 일더라고요.

그리고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던 15살의 어느날 밤이었습니다. 불 끄고 이불 위에 누웠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내가 살아봤자 길어야 100년일텐데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거지?



지금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제가 아무리 상상해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나름 모태신앙으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런 제게도 죽음 이후는 상상이 안가더라고요. 어쩌면 제가 생겨먹은게 나일롱 신자라서 천국이나 지옥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지 못했 겁니다.

두려웠습니다. 죽음을 몰라서요. 내가 사라져버린다는게,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갑자기 두려워져서 온 가족이 잠든 거실을 서성이며,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저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 없네요.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



사족이 길었네요. 사실 이 책은 죽음 이후를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전 애초에 이 책을 읽지도 않았을 거에요. 죽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죽음 이후를 설명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죠.

이 책은 내 앞에 닥쳐온 죽음의 순간에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관한 책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죠. 그러던것이 1980년대에 이르자 이 비율이 17%로 줄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병원에서 죽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죽는 경우는 심장마비, 뇌졸중, 사고 등의 원인이 대부분이죠. 많은 사람들은 암, 노화 등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으며, 병원에서 임종을 맞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예외는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당신 역시 83%의 비율에 속할 확률이 더 클겁니다.(그리고 부디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적어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는 있잖아요.)


이것은 현대화,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종래의 대가족에서 노인의 지위는 현대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어요. 노인들은 경륜에서 비롯된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고, '나이가 들었음에도'가 아니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가족 전체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한 대가족 체제였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이 경제 생산활동을 하지 않아도 그의 자식들이 충분히 노인을 부양할 수 있었죠.

그러나 산업화 이후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노인들은 가족 내에서 본래의 지위를 서서히 잃어갔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가 집 안에서 온가족에게 둘러여 임종을 맞이했던 것이, 병원이라는 낯선 장소로 변경되었죠.



에드바르 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1895



오늘날 한 사람이 갑자기 큰 병에 걸리거나, 노환이 심해지게 되면 가족들은 보통 둘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자녀가 직접 부모님의 병수발을 들거나, 요양원에 위탁하는 것이죠.


우선 전자를 살펴보겠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모셔오기 위해 거실에 침대를 들이고, 집 안 구조를 바꾸는 등 대대적인 조정을 합니다. 사실 이건 별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부모님을 위해 그렇게 하죠. 하지만 문제는 같이 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는 녀와 그 역할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장이 아니라는 것을 마땅찮아 하죠. 그리고 보통 자의 집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종전의 인간관계, 생활기반 등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식들도 힘든 것은 마찬가집니다. 우선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수시로 부축해 드려야 하고, 씻겨 드려하죠. 약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식습관 역시 바꿔야 합니다. 방문을 열고 닫는 것, 집안 온도를 조정하는 것, TV를 켜고 끄는 것(보통 노인들은 귀가 잘 안들리기 때문에 TV를 보려면 소리를 매우 크게 틀어어야 합니다) 등의 사소한 생활습관에서 마찰이 생깁니다. 한밤 중에도 부모가 급하게 부르면 달려가야 하고요, 잦은 병원 검진에 따라가야 하죠. 조금만 상상해봐도 아시겠지만 이 스트레스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 같네요.

오늘날과 같이 의료화된 시대에 장애가 있고 노쇠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기술적인 면에서나 일상생활 면에서나 엄청난 임무입니다.


그렇다면 요양원에 들어가는 경우는 어떨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요양원 안에서 노인들의 개인으로서의 인격은 말살되어 버립니다. 어느 요양원에서든 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고사하고, 그들 옆에 앉아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조차 거의 없습니다.

실은 요양원 자체가 유럽과 미국의 구빈원(救貧院, poorhouse)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빈원은 수백 년 전부터 있었고, 나이가 들어 도움이 필요한데 자녀나 가진 돈이 없으면 몸을 맡길 곳은 구빈원 밖에 없었죠. 기본적인 위생 관리도 없었고, 주거 환경은 말도 못하게 더럽고 황폐화된 게 보통이었습니다. 1950년대 의학이 발달하고 병원이 성장하자, 구빈원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은 구빈원이 제공하던 수요를 모두 감당할 수 없었죠. 그래서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을 지었고, 그것이 현대 요양원의 시초인 것입니다. 즉, 요양원은 노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어진 것입니다. 노인들을 위한 시설인 요양원이라는 제도는 애초에 노인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의 사회 문제에 대한 대안이었죠.

보통 요양원의 노인들은 '감금'되어 정해진 규칙대로 생활합니다. 마치 교도소의 재소자들처럼 말이죠. 이전까지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재소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면, 과연 그 삶은 행복할까요?



에드바르 뭉크 <절규>, 1910



저희 집도 그런 선택에 직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7년 전, 할머니께서 쓰러지셨고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셨어요. 결국 할머니께서요양원에 들어가셨는데요, 사실 저는 어렸을 적 할머니와 같이 산 것도 아니고, 명절 때만 가끔 뵜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가까운 편은 아니었어요. 때문에 요양원에 들어가셨을 때도,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몇년 뒤에 아버지가 그 당시에 쓴 글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농장 식구가 갑자기 불어써요
토끼는 네 마리,병아린 열 마리,강아진 여섯 마리
무지 이뻐 안아보고 시퍼요
그라고 시퍼도 몸 내놓고 막아서는 어미!
자식 안위에 지 목슴 버릴라 카대요
품에 안아 재우고,입 안에 것도 배터 먹이대요
울 엄마도 저려했겠지요??
나는 어떤지??
난 짐승 만도 못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버지의 글을 읽고 나서도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아부지 가슴이 많이 아프신가보다...' 했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당시 아버지의 상황과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네요.



에드바르 뭉크 <별이 빛나는 밤>, 1893



다시 한 번 질문드릴게요. 당신은 당신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이 책을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마주하는 것이 현명한지를 말합니다. 여러 사례를 통해 각각 다른 방식의 죽음을 보여주고,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죽음이 바람직한 스스로 깨우칠 수 있게 유도하죠.


현대 의료체계는 생명을 연장하는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나 목적과 같은 것은 부차적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죠.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완치 가능성을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치료 형태가 과연 옳은 것일까요?


상상조차 하기도 싫지만 본인이 말기 암 환자이고 항암치료를 해봤자 3개월 밖에 더 살 수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고작 3개월의 고통스러운 생명 연장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치료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암이라는 질병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에서도 건강은 극도로 손상되죠.

반면에 항암치료를 포기한다면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제가 제시한 두 가지 선택 이외에도 선택더 많이 있을 겁니다. 문제는 현대 의학이 환자에게 오직 첫 번째 방법만을 제시한다는 것이죠.


저자는 인간이 죽음을 마주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이 책을 읽어보신다면 현대의학의 고질적인 문제와 삶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에드바르 뭉크 <태양>, 1910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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