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경채 Feb 24. 2019

줄을 잘 서야 하는 이유

우연한 줄이 인생을 결정한 순간들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인생에서 줄을 서 있는 시간은 “2년”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 이야기들은 사회 통념상의 줄을 잘 서자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진짜로 인생에서 “대기”를 잘 한 순간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이다.


1. 2003년 3월

줄을 잘못 섰다. 대학 입학 첫날, 내가 입학한 상경대학은 성씨의 ㄱㄴㄷㄹㅁㅂㅅ 순으로 반을 나누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씨는 주로 1, 2, 3반에 많았고 최씨나 허씨는 아마도 10반 넘어가서나 많았을 것이다. 나는 최씨다. 아마 11반이나 12반 정도가 되어야 맞는데,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가 김모씨와 그녀가 배정받은 상경 3반 앞에서 얼쩡대다가 정말 "어쩌다가" 그 줄에 서버렸고 그렇게 4년간의 내 준거집단이 결정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 시절 친구 중에는 김씨가 유독 많다 - 대한민국 김씨 비중 21.5%의 한 3배가량 될 것이다. 우연한 결정이 평생의 친구들을 결정했고, 만약 그때 내가 성씨대로 줄을 내 멋대로 서지 않고 규율에 맡겨 제대로 섰다면 어땠을지 아찔할 정도로 나는 즐거운 대학 시절을 보냈고 지금까지도 말이 가장 잘 통하는 귀한 벗을 얻었다.


2. 2013년 4월

줄을 섰다, 이번에는 제대로. 보스턴이 아무리 추운 동네라지만 4월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추운 아주 이상한 날이었다. 학교에서 밤까지 친구들과 숙제를 하고 돌아가기로 결정, 근데 와 너무 춥다. 유학 시절, 우리 누구도 택시를 마구 탈 정도로 돈이 없었고 주로 Library에서 집까지 한 20분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추위에 더해 그 날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일명 "쪼리 샌들"을 신고 나와서 발가락 사이사이로 찬 바람이 슝 지나다녔다. 많은 고민 끝에 친구들과 택시를 타기로 했고 택시 스탠드에 줄을 섰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고 정확히 10분 후, MIT 캠퍼스에 총격 사건이 났으니 다들 추후 안내가 있을 때까지 있는 곳에서 나오지 말라는 학교의 다급한 문자를 받았다. 총격이 일어난 곳은 만약 우리가 도서관에서 집까지 걸어왔다면 걸어서 지나갔을 건물이었다. 그것도 딱 그 시간에. 이 사건의 범인은 정확히 하루 후에 보스턴 마라톤 테러범이 된다. 그날 밤, 택시를 타기 위해 섰던 줄이 살면서 가장 잘 선 줄 중에 하나가 아닐까?


3. 2016년 11월

줄을 섰다, 너무 지겨워서. 뉴욕에서의 복잡했던 인생을 정리하고 싱가포르에 온 지 정확히 3개월 된 시점. 일 때문에 갔던 컨퍼런스가 너무 지루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재미없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컨퍼런스가 시작한 지 딱 1시간 만에 포기하고 택시를 타고 이 곳을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택시 줄에 사람이 와글, 근데 내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어디서 많이 본 듯했다. 내가 미국으로 대학원을 가기 전 싱가포르에 잠시 일할 때 내 보스였던 여자이다. 우리는 서로 반가워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금융권을 벗어나서 테크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쌓고 있었고 나는 새로운 도전을 찾고 있었다. 한 5분 정도를 얘기했을까, 우리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각자 택시를 타고 갔다. 그리고 3개월 뒤, 나는 그녀가 재직하고 있던 회사로 이직을 하고 아직까지도 그곳에 있다.


때로는 이렇게 작은 우연이 인생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줄 서는 거, 너무 싫어하지 말지어다.

작가의 이전글 노르웨이 테크 회사 체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