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체험은 조기 종료되었습니다
뉴욕에서의 생활을 접고 싱가포르로 오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먹고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뉴욕에 같이 있던 동료의 소개로 노르웨이 테크 회사를 알게 되었고 그 회사에서 때마침 아시아 핀테크 사업 진출을 맡아 줄 사람을 찾고 있어서 인터뷰를 하고 합류하게 되었다.
워라밸의 끝판왕
북유럽 국가의 기업 문화나 워라밸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어는 보았을 것이다. 완벽한 사회 복지국가, 그 이상향으로 주로 거론되는 곳들이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다. 출근 첫날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회사의 본사는 오슬로 조금 외각에 있기 때문에 오슬로 시내와 캠퍼스를 연결하는 셔틀을 운영하는데, 이 셔틀의 막차는 오후 4시 30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4시쯤 되면 건물에 아무도 없다. 또한 내가 만난 대부분의 결혼한 동료들은 아이가 셋이다. 둘도 찾기 힘들고 대부분이 셋, 혹은 가끔 넷인 집도 있다. 아시아 지사인 싱가포르로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4-5시 이후로는 층에 사람을 찾기 힘든 기업 문화다. 여성 비율도 상당히 높다. 내 매니저도 여자였고 그녀의 매니저도 여자였으며 팀의 남녀 성비를 보면 여자가 더 많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회사를 아주 높이 평가한다. 후에 이 회사를 나오고 친구들에게 퇴사했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친구들이 "아 그 아마조네스 회사 그만둔 거야?"라며 [아마조네스 회사]로 통했다. (아마조네스는 여전사로만 이루어진 전설의 부족이다)
노르웨이 본사 캠퍼스 - 정말 오리 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참 북유럽스러운 풍경이다.
느려도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한 가지, 꽤 중대한, 불만 사항이 있었다. 일이 빨리 진행되는 회사가 아니었다. 내가 본 이 회사의 재미있는 점은 갈등 해결 방식이었다. 갈등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고 일이 빨리 진행되려고 하다 보면 모두의 의견을 반영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데, 그런 경우에 한 명의 독단적인 의사 결정보다는 모두가 방에 들어가, 혹은 컨퍼런스콜로 3시간이고 4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회의라도 30분 이상 넘어가면 그 회의는 불필요한 회의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길고 긴 칠흑 같은 회의는 정말로 들어가서 제정신으로 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새로운 핀테크 사업을 추진하는 사람으로서 미치도록 필요했던 것은 투자금인데, 돈을 얻는 과정도 정말 길었다. 우리 회사의 모회사는 사실상 노르웨이 국영 기업이었는데 이 사실도 느린 의사결정에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슬로에서 보이는 바다. 워크샵 후 착잡했던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파키스탄과 미얀마 전문가로
우여곡절 끝에 사업의 가닥이 파키스탄과 미얀마로 잡혔다. 우리는 이 두 나라에 집중을 하기로 했다. 파키스탄과 미얀마 둘 다 디지털화되어가는 나라들이고 핀테크가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들, 즉 e-commerce (전자상거래)의 발달이라든지 정부 차원의 투자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 외국 회사가 들어가서 잘 되기에는 너무 열악한 시장이라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어 잘만 들어가면 유리하게 선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팔자에도 없는 노르웨이 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더하여, 팔자에도 없는 파키스탄 출장만 6개월에 5번은 다녀왔다. 우리나라에서는 파키스탄에 대한 이미지가 테러와 겹쳐서 매우 안 좋은데, 적어도 제휴사 사람들은 매우 따듯하고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갈 때마다 경호원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 가끔 이슬라마바드 고속도로를 지나가면 총이나 바주카포를 들고 있는 경찰/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꽤 보인다는 점, 부모님 걱정하실까 봐 파키스탄에 출장 간다고 말을 못 하는 점, 등은 나를 조금 지치게 했다. 아주 고약하게도 파키스탄 대사관 직원이 하필이면 내 미국 비자 뒤에 파키스탄 비자를 떡하니 붙여놔서, 미국에 입국할 때마다 나는 매서운 이민 당국의 추가 질문들을 받는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시장 조사 중
조직 변동, 그리고 굿바이
역시나 회사 전반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지 4-5개월 된 시점에서 대대적인 조직 변동이 일어났다. 사내 메신저의 흥미로운 기능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이 오프라인으로 있은지 몇 시간이 됐는지 나오는 기능이 있는데, 어느 날 보니 아뿔싸, 노르웨이에 있는 내 동료들이 오프라인인지 25일, 30일, 40일, 이렇다. 혹시 죽은 걸까 걱정도 잠시, 링크드인으로 보니 다들 조직 변동으로 인해 이미 이직을 해버린 상황이었다. 주 20시간 일하는 달콤한 직장을 내 발로 걷어차고 나오기는 참 싫었지만 역시 핵노잼을 못 참는 성격 탓에 과감하게 나와버리고 결국 이 회사와 연을 함께한 지 6개월 만에 작별을 고했다.
그렇게 짧게, 나의 노르웨이 테크 회사 체험기는 종료되었다. 얻은 것이 딱 하나 있다면 너무 느긋한 페이스의 조직은 나와는 상극이라는 점,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파키스탄 핀테크 마켓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알아봐야 별로 쓸모는 없는 거, 나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