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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푼 Sep 23. 2022

어떤 섬네일들

  이제는 기억나지 않게 된 것이 더 많아진 오래된 겨울. 교복을 안 입어도 되는 날이면 종종 도시의 이곳 저곳을 쏘다녔다. 특별한 목적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혼자임을 주체하지 못할 때면 하게 되던 소박한 취미였다. 처음에는 집 근처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나중에는 TV나 책, 노래가사에서나 보고 들었던 종로, 삼청동, 동대문, 강남, 압구정 같은 곳을 찾아 가서는 무작정 돌아다녔다. 그렇게 돌고돌아 처음으로 신촌을 찾았다. 그 날 마침 걸음 걸이를 맞추고 있던 노래의 가사가 눈 앞에 있었다. ‘카페 간판 위로 깜빡이는 불빛, 바쁜 걸음으로 집에 가는 사람, 술집 불빛 아래 사람들의 웃음, 저녁 장을 보는 시장 속의 풍경’. 그 이후로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신촌에서 보내게 되었고, 신촌은 지금까지도 내게 늘 갈색의 거리이다. (브라운아이드소울, <Brown City>)


  서툴렀던 첫 연애에 마침표를 찍어 가던 봄. 잠시 떨어져서 시간을 갖자는 말에 기다리겠다는 말 이외의 대답을 떠올리지 못 했다. 정리해야 할 생각이 많아 시간이 필요했을 그 친구와는 달리, 내게는 의도치 않게 너무나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잠실에서 용산으로, 다시 용산에서 잠실로 하염없이 걸었다. 고작 몇 주였지만, 걸을 때마다 들었던 노랫말마따나 내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는 견디기 힘이 들도록 쌓여갔다. 한남대교 위에서 노을이 맺힌 강물이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어두운 바다를 떠돌아 다니는 부서진 조각배 위에 누인 내 작은 몸’이었다. 기다림 끝에 결국 그대로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이승열, <기다림>)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일상을 앞둔 여름. 가깝지만 먼 나라로 떠나는 나를 응원해 준 사람도 많았지만, 굳이 왜 그 곳으로 가냐며 걱정 속에 의문을 담아 묻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가끔은 거기에 약간의 비난이 미묘하게 섞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것 처럼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로 대답했다. 지난 밤에 몇 번이고 확인 했으면서 혹여나 빠진 것이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집을 나섰다. 공항에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걸어가면서, ‘다른 생각과 다른 풍경 속’으로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10년 전 부터 늘 플레이리스트의 한 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노래를, 앞으로 펼쳐질 생활을 담은 영상의 배경음악으로 쓰리라 다짐했다. 영상은 생각보다 빨리 만들어졌다. (브라운 아이즈, 박정현, Chemistry, Sowelu, <Let’s get together now>)


  조용하게 지쳐가던 가을.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고 있는지, 할 수는 있는지 자꾸만 물음표를 붙이게 되던 일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에는 일이 쏟아졌고 저녁에는 꾸역꾸역 마무리해내야 하는 하루하루였다. 어제 제대로 맺지 못한 일은 오늘의 걱정이었고, 오늘 미뤄진 일은 내일의 부담이었다. 그러다 간만에 온전히 마무리가 되었다는 느껴졌던 날이 있었다. 내가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하루. 퇴근을 하고 나서 집에 차를 세워두고 남산 순환도로를 한 바퀴 돌았다. 중간에 놓여진 벤치에 잠깐 앉았는데, 순환도로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전조둥이 미묘하게 어긋난 리듬으로 나를 비추며 지나갔다. 이어폰에서는 ‘확실한 것만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라는 가사가 흘러나왔다. 계절이 한 번 더 바뀌기 전에 회사를 나왔다. (Awesome City Club, <Around the World>)


  어떤 순간은 모든 것이 정지된 하나의 장면으로만 기억된다. 그대로도 물론 좋지만, 종종 노래는 그 장면에 시간을 불어넣어주는 힘을 갖는다. 고요하게 멈춰있던 섬네일의 버튼이 눌려, 어떤 멜로디 또는 어떤 가사와 함께 짧고도 길게, 길고도 짧게 한 편의 영상으로 재생된다. 영상으로 남는 기억들은, 장면일 때보다는 조금 더 풍성한 추억이 된다. 그 추억은 어떤 노래로 하여금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한다. 노래를 듣다가 어느 하루의 어느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그 순간이 떠올라 어떤 노래를 찾아 듣게 되기도 한다. 추억은 자주 노래에 빚을 진다. 노래 또한 그렇다.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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