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구푼 Sep 09. 2022

누군가의 표정을 만드는 일

  한 장소에서 바텐더로서 손님을 맞이하게 된 지 2년 남짓이다. 매일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상이다. 가게의 구석 구석을 쓸고 닦거나, 여러 재료를 쓸 만큼만 나누어 차곡차곡 정리하거나, 묵묵히 얼음을 손질하거나, 술과 시럽을 만드는데 쓰는 과일을 만지작 거리며 손님을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던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반갑지 않을리가 없다. 가끔은 무리한 요구나 무례한 언행에 마음 속의 무언가가 구겨지는 순간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우리가 준비한 음식과 음료를 맛있게 먹고 마셔주었으면 좋겠고, 이 공간에서 보낸 짧은 순간이 가끔은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 손님이란 어찌됐든 고마워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게 만드는 존재다.


  생각해보면 성인이 되고 나서 줄곧 틈틈이 손님들을 맞아 왔다.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을 처음 건내게 된 곳은 대학가의 한 아이스크림 전문점이었다. 가끔 오던 꼬마 손님들에게 작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주면 자그마한 손으로 받아서 오물오물 먹던 귀여운 얼굴들이 기억난다. 제대를 하고 일본에서 지낼 때는 라멘집에서 손님들을 기다렸다. 정신없이 면을 삶으면서도, 돌아오는 빈 그릇에 기분 좋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복학을 하고 나서는 친한 형의 제안으로 학교 앞에 있는 술집 겸 복합문화공간을 맡아 운영했다. 가끔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이 우연히 가게에 손님으로 오면, 바 안쪽에 있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재밌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졸업할 때 쯤 막연하게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주류회사에서는, 손님을 기다리는 이들을 손님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그들이 맞이하게 될 손님들에게 우리가 취급하는 술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했다. 개중에는 이름이나 숫자에만 관심을 두던 이들도 있었으나, 농가에서부터 양조장을 거쳐 누군가의 술잔에 담기는 데까지 쌓이는 술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손님들에게 온전히 전할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주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 덕분에 덜 외로웠지만, 그렇게 담긴 술잔에 비치는 손님들의 표정이 늘 궁금했다. 그래서 가끔 주류 박람회나 대형 행사에 참가하게 되면 고되기는 했지만, 직접 손님들과 대면할 수 있어 괜히 신이 났다. 상상으로만 만나던 표정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퇴사를 하고난 뒤, 충분히 휴식을 하고 나서 우연한 기회에 근사한 회사에서 운영하는 공간을 관리할 기회가 주어졌다. 현장에 있는 이들을 위한 운영적, 사무적인 지원이나,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기획 또는 행사의 조정이 업무의 주된 내용이었다. 공간 관리에 필요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고민할 수 있는 자리였지만, 손님과 맞닿을 기회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랬었기에 손님이 있는 현장이야말로 스스로가 빛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기간을 모두 채우고 다시 회사를 나왔다. 곧바로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왔지만, 다행히도 일해보고 싶었던 곳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어 그대로 바텐더가 되었다.


  사실 바텐더가 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바텐더로서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해서 되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말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호기심에 바텐더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 안쪽에 서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많은 준비부터 손님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 달거나 혹은 쓴 반응과 가끔씩 생기는 소중한 에피소드들은 바 바깥에 앉아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일테니 말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갖게 될 내 공간의 밀도를 높여줄 소중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매일같이 반복한 동작과 동선이 질리지는 않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이 일을 꽤나 좋아하고 있다고 느낀다.


  가끔 어떤 칵테일을 처음 주문해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손님이 있다. 누군가의 처음을 만드는 일이란 늘 어렵다. 손님과 그 술의 첫 만남을 기분 좋게 주선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 다른 곳에 가서 다시 주문하기 전까지, 이 손님에게 이 술의 인상은 내가 만드는 이 한 잔으로 남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온갖 마음을 담아 만든 술을 잔에 채우고, 손님이 맛을 본다. 적당한 리듬의 끄덕거림이 약간의 미소로 이어지면 그제서야 나도 웃음을 짓는다. 어쩌면 바텐더란 누군가의 표정을 만드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하며 다음 표정을 만들기 위해 술을 고른다.


  2022년 6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