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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푼 Sep 01. 2022

아주 익숙한 처음

  아침에 일어나면 꼭 물 한잔을 컵에 따라 마신다. 세 번에 나눠서 꼭꼭 씹어 먹듯이 마시면 좋다고 들은 뒤로 그렇게 하게 된다. 출근을 하는 길엔 꼭 커피 한 잔을 산다. 조명과 음악을 켜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업무가 시작된다. 누군가는 창가에 둔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할 것이고, 조용히 앉아 종이 신문을 뒤적이기도 할 것이며, 어항 속의 물고기들의 안부를 확인하기도 할 것이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알게 모르게 처음 일상을 맞이하는 의식의 단계가 있다. 그날 하루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행해지는 전제의 영역. 이러한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하루의 처음이, 각각 다른 내용으로 채워질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준다.  


  매일 비슷하게 시작되는 일상에 지나치게 충실해온 탓인지, '처음'이라는 말을 발음할 기회가 드물어졌다. 처음은 결코 반복될 수 없으므로, 당장 해야하는 것이 많은 매일 매일의 사이에 처음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어쩌면 이미 겪은 것이, 아직 겪지 못한 것보다 많아서이지 않을까란 생각도 가끔 하게 된다. 여태까지의 경험들은 처음을 '굳이'라는 오만함으로 짓누르기도 하고, '이제와서'라는 민망함으로 가려버리기도 한다. 처음임이 당연한 적도, 처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말과 문장이 붕 하고 들뜨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샌가 처음과 일상에는, 시작과 마지막 만큼의 거리감이 생기고 말았다. 그 사이를 아련하면서도 그리운 느낌만이 채우고 있다. 그 거리감 끝에 있는 처음은 너무도 어색한 것이 되어버렸다.


  일상과 멀어진 '처음'은 반대로 '새로움'이라는 말과 너무도 가까워져서 가끔은 하나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것이 처음을 더욱 부담스럽게 만든다. 새롭다는 말은 그다지 담백하지 않다. 탄생이라는 숙명적인 처음을 경험한 이후로, 그 뒤에 겪는 모든 새로움은 그만큼의 낡음이 되어 쌓여간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은 신기한 동시에 서툰 것이고, 신선하지만 낯선 것임을 깨닫는다. 서툰 것은 번거롭고 낯선 것은 두렵다. 무턱대고 새로움을 탐하기에는 귀찮아서 게을러지고, 무서워서 꺼려지게 된다. 무언가를 굳이, 이제와서, 처음,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리는 상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 어딘가가 괜히 가려워진다.


  처음인 것, 새로운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처음이지 않기, 새롭지 않기에 얻을 수 있는 안정 또는 효율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와 함게 따라오는 권태와 무료함이 처음과 새로움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 버리기도 한다. 어딘가 거창해야 할 것 같고, 대단해야 할 것 같고, 눈에 띄는 변화나 발전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처음과 새로움을 제대로 바라볼 기회를 숨겨버린다. 일상이라는 말로 뭉쳐져 있는 하루하루는 사실 유심히 살펴보면 처음인 것 투성이다. 어제 따른 물과 오늘 따른 물의 온도가 같을 수 없고, 물을 머금은 화분의 모습은 어제에 비해 조금은 더 자라있을 것이다. 신문의 내용도, 어항의 풍경도 어제와 같을 수 없다. 비슷해 보이는 매일의 처음은 단지 익숙할 뿐, 결코 반복된 적이 없다.


  익숙함은 처음이나 새로움의 반대말이 아니다. 분명 처음 겪는 온도, 모습, 내용, 풍경임에도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자세히 보지 못했을 뿐이다. 처음인 것, 새로운 것은 일상의 도처에 널려있다. 일상은 아주 익숙한 처음들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처음과 새로움은 의외로 용기가 필요한 말이 아니다. 매일 물을 마시고, 화분에 물을 주고, 신문을 읽고, 어항을 바라볼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딱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을 만큼.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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