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웃던 GR65

만 65세 할머니의 몸부림친 여행기 13

by 꿈돌

<나는 왜 여기 왔나? >

6/17 월요일

오몽 오블락(Aumont-Aubrac 21.5km)을 향해 걷다가 산길 중턱에서 리타 성녀의 작은 동굴 성당을 만났다. 지나가는 길가에서 조금 쏙 들어간 곳에 있는 작은 동굴이다 보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동굴 안에 의자라고는 양쪽으로 네 개씩 8개뿐인데, 돌을 세워 만든 작은 제대가 앞에 놓여 있었다. 리타 성녀는 결혼생활에서 학대받는 여성들,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을 하는 이들,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여성들, 좌절하고 실망한 이들, 불임으로 고통 받는 이들, 상처, 고통, 상실감으로 낙심한 이들의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잠시 의자에 앉아 쉬었다. 성녀는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로 아들 둘이 살해당했는데, 남편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권면했단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가 참 어렵다.

엊저녁 동독아저씨의 이야기도 충격이었지만 나역시 주님께 아이들을 맡기는 기도를 하면서도 사실 난, 내가 주님을 온전히 못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꽤 큰 후 명동에서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으로 생활 피정을 할 때였다. 석달 이상 매일 한시간 이상씩 기도를 하며 하느님을, 그리고 내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 힘겹기도하고 놀랍기도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마지막날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봉헌식을 하는데 나는 내 등뒤에 뮌가를 숨기고 있었다. 들여다보니 둘째 아들놈이었다. 도저히 맡길수가 없었다. 아니 왜? 왜 못 맡기는거지?.... 내가 내 자신에게 물었다. '하느님께 맡기면 더 고생시킬카봐.' 그게 나의 이유였다. 이성적으로야 얼마나 어리석은줄 알지만 감정적으로 내가 데리고 있어야 이놈의 앞길을 가로 막는 모든 가시밭을 내 몸으로 덮어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고 모든것을 맡긴다면서, 업어주시는 그분의 등에 달라붙지 못하고 업힌 체로 옆에 있는 난간을 꼭 붙드는 바람에 오히려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형국이라 하겠다.

내 평생의 기도제목이 자식을 위한 거고, 아픈 내 몸뚱아리를 위해 자다가 단번에 데려가시란 기도도 어찌보면 말년에 자식 고생시킬까봐 하는 건데..... 말로는 온전히 맡긴다면서 그러하니 내뜻대로 해달라는 바램까지 철저히 이기적이고 내 중심적인 이 뿌리의 밑둥까지 나를 사랑하시는걸까? 온전히 믿지도 못하고 온전히 맡기지도 못하는 나의 부족함이 성녀의 깊은 마음을 어찌 헤아릴수 있을까.

이제 이 나이엔 사람의 일은 대충 다 이해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알수없는 일들이 더 많아지는것 같다.

이제 전나무 숲을 지나간다. 오는 도중엔 노란 꽃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전나무 숲을 보니 또 다른 풍경이 멋지다. 바이크 족들이 옆을 지나치며 “부엔 까미노” 하고 외친다. 길을 비켜주면 눈인사를 하기도 한다. 우린 숲 안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아 앉아 물과 과일을 먹고 각자의 몸에 뜸을 뜨기 시작했다. 다리가 벌써 많이 딴딴해 졌다. 하지만 손으로 누르면 얼마나 아픈지. 배운 대로 침을 놓고 뜸을 떴다. 침뜸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난 이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목장길을 걷다가 성 야곱을 위해 지었다는 성당을 만났다. 역시 돌 벽돌로 지어졌지만 또 다른 느낌이고 모양도 다르다. 참 예쁘다. 이런 성당을 보는 것이 즐겁다. 유리창이 모두 스테인드 글라스로 되어 있는데, 그 그림들이 다 의미가 있단다. 나이 많은 프랑스 할머니가 우리에게 그림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해주는 프랑스어가 노래 같다. 미소를 띤 체 바라보고 있으니 다른 중년 부인이 다가와 영어로 통역을 해준다. 그들의 친절이 내 마음에 아름답게 각인된다.


18km 정도를 걷고는 나머지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우버 택시는 계속 기다리라는 표시만 뜨더니 결국 밧데리가 나갔다. 이를 어쩐다? 여기 저기 물집이 난 내 발로는 더 이상 걷기가 힘들다. 언니야는 보조 밧데리까지 꺼내서 택시를 부르려 애를 쓰고, 나는 얼른 마을로 들어가 바(Bar)나 카페를 찾았다. 동네분 한 분이 지트를 겸한 바를 가르쳐 주셔서 얼른 그리로 갔다. 바의 주인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택시를 불러 달라 하니, 흔쾌히 “노 프라블럼”. 15분 쯤 후에 동네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자그마한 차가 한 대 와 섰다.

문제는 이 할아버지가 자기 차에는 한 사람 밖에 못 탄다는 거다. 자세히 보니 앞자리에만 자리가 있고 뒤는 텅텅 빈 화물칸이다. 언니야가 내게 혼자 먼저 타고 숙소로 가란다. 자기는 걸어가겠다면서. 이럴 수는 없다.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막강하게 버티며 실랑이를 하고 있는 우리를 보던 할아버지가 한사람은 그럼 뒤에 타라며 짐칸을 열어주셨다. 드디어 출발! 나는 앞에 타고 언니야는 짐칸 바닥에 앉아 손잡이를 꼭 잡고 숙소로 향했다.

오몽 오블락의 숙소는 중세식으로 지어진 꽤 큰 집이었다. 우리가 자는 방도 아주 큰 방으로, 침대며 방의 장식장과 벽난로, 창문이 다 옛스러웠다. 욕실과 화장실만 현대식으로 고쳐 편리함까지 갖추었다. 여주인장은 80세의 할머니로 마당까지 있는 이 큰집을 혼자 관리한단다. 아주 꼬장꼬장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아래층의 넓은 식당에서 할머니와 우린 셋이 저녁을 먹었다. 연어구이와 절인 시금치가 메인으로 나왔는데 맛있었다. 프랑스 남부 길에 있는 숙소들은 대부분 저녁밥과 아침밥을 주고 식사시간 동안 주인장도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 할머니는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며 무척이나 반가워했는데, 요즘 들어 한국인 순례자가 왜 이렇게 많아졌는지 모르겠다며 왜 멀고도 먼 이곳까지 오는 거냐며 물었다. 사실 이 길에는 한국인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동양인은 우리뿐이었다. 일본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은 다른 길에도 많지 않단다. 하지만 스페인 길엔 한국인이 엄청 많단다. 그러게, 한국인들은 왜 그토록 산티아고 길에 열광하는 것일까? 나는 설명해야했다. 첫째, 한국인들은 걷는 것을 좋아한다. 둘째, 걷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치유가 된다. 셋째, 종교적으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200년 밖에 안 된다. 그나마 100년은 박해가 심했다. 여긴 2000년이 넘은 역사가 있지 않나. 그 오래된 믿음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체험하기 위해서...... 주저리주저리 읊었다. 우리가 오는 게 못 마땅한 거야 뭐야. 이런 속상한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나 여기 왜 왔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할머니는 7시부터 시작한 식사가 9시가 넘어도 끝나지 않아, 좀 피곤했다. 결국은 너무 피곤해서 이쯤에서 먼저 자러 올라가도 되겠나며 양해를 구하고 헤어졌다. 2층으로 자러 올라가는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생각은 나중에......

'그런데, 걷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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