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65세 할머니의 몸부림친 여행기20
<모험과 도전 >
6/24 월요일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데스땅의 성을 구경하러 나섰다. 데스땅은 여기에 성을 짓고 이 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었는데, 당시엔 교회를 짓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던 것과는 색다른 일이란다. 데스땅의 성은 마을 위에서 마을 앞을 흐르는 롯강을 내려보고 있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빈 성은 그 화려함과 웅장함의 빛이 바랜 듯 공허해 보였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들어가지는 못하게 되어있어 밖에 서서, 이제는 퇴색한 옛이야기의 중심이었던 성을 바라본다. 비단 옷을 입은 여인들과 충성심을 맹세한 기사들, 호령하던 성주도 세월의 뒤 안으로 사라진 성은 왠지 쓸쓸하다.
공연히 쓸쓸한 마음으로 내려오는데, 마을 사람들이 열 댓 명 몰려와서는 그 곳 일대를 쓸고 닦으며 청소를 한다. 성에서 내려오는 계단과 계단사이의 풀 하나까지도 다 뽑고 길에 박힌 돌과 돌 사이의 먼지 하나하나까지, 빗자루로 깨끗이 닦아 예전의 모습이 보존되도록 손을 보는 것이다. 여자들은 머리 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입고, 남자들은 모자를 쓰고 조끼를 입고 쓸고 닦는 폼이 즐거워 보여 마음이 밝아졌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이렇게 소중히 가꾸는 마음들이 있으니 이 마을이 이런 아름다움을 유지하는구나, 싶었다.
오늘 일정은 에스페이락 (Espeyrac)까지 23키로 인데, 우린 골리악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남은 8키로 만 걷기로 한 셈이다. 너무 조금 잡았나? 그냥 걸어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 좀 일찍 가서 쉬고 그림도 그려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4시간을 족히 걸어야할 길을 단 20분 만에 왔다. 골리악 성당은 아담했고, 성당에 들어선 나는 곧 돌로 된 아치모양의 천장과 기둥 사이에 포근히 안겼다. ‘주님, 날아 왔어요.‘ 나는 겸연쩍어 하며 미소 지었다. 기도도 하고, 초도 봉헌하고, 방명록에 글도 남기고, 우린 길을 나섰다.
사실 산티아고를 향해 순례를 하고 싶다는 소망은 막연한 동경이었다. 막상 출발했을때 나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고, 걷기 시작하면서 출발할 때의 두려움은 모양새를 바꾸어 어려움과 고됨으로 다가섰다. 이제 출발한지 보름이 다 되어가니 모험과 도전의 형태가 되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걱정 반 설레임 반이 된 것이다. 걱정이야 타고난 성격이니 배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설레임이 걱정을 누르고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다행히 길은 더 늘어나지 않아 어렵지 않게 걸었다. 어제 지랄 65라고 투덜거렸더니 효험이 있던 것일까? 하지만 바람이 어찌나 부는 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계속되는 초원지대엔 바람을 막아줄 곳도 별로 없다. 그 와중에도 사운드 오브 뮤직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걸었다. 에스페이락 숙소가 세시 반에 입장하게 되어 있어 우린 마을 어귀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글도 쓰고, 소식도 전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하고 의자가 편안하다. 오늘 숙소의 저녁 메뉴에 기대가 간다.
대개 저녁은 코스로 주는데 첫 번 째는 샐러드나 수프. 날이 쌀쌀해서인지 따뜻한 수프를 한 사발 먹고 나면 몸이 싸악 풀리면서 너무 행복해 진다. 여러 가지 콩이 섞인 수프가 나오기도 하고, 당근으로 만든 수프도 나왔는데, 루를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닌 그냥 재료들의 맛을 살려 섞어 끓인 것이라 내 입엔 너무 잘 맞았다. 메인으로는 찜 형태의 고기 요리나 생선, 구운 가지와 토마토 같은 야채를 곁들이는 것이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찜 형태의 소고기나 닭고기가 맛있어 거의 남김없이 다 먹었다. 물론 식탁 위에 바게트와 치즈는 기본으로 깔린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프랑스 인들은 바게트 빵으로 접시에 남은 소스까지 다 닦아 먹었다. 우리도 그걸 보고 남은 소스까지 다 먹어 치웠다. (프랑스인들은 그렇게 먹으면서도 어찌나 빨리 먹는지, 그 많은 말을 하면서도 우리보다 더 빨리 먹는다.) 마지막으로 디저트가 나온다. 이미 배가 불러도 디저트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대부분 자기들이 구워 만든 케익을 주거나, 과일을 갈아서 위에 허브 잎을 얹거나, 샤베트 같은 걸 주는데 하나같이 너무 맛있었다. 그동안 삼시세끼를 어찌나 잘 먹었는지 그렇게 걸었는 데도 살은 하나도 안 빠졌다. 대신 아프지 않으니 너무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매일 맛난 저녁 식사를 기대하는 일도 우리의 일정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곳 숙소의 주인은 식료품점을 겸하고 있어 우린 식료품점으로 찾아가 숙소의 안내를 받았다. 저녁 식사도 식료품점으로 오라고 해서 갔는데, 피크닉 백에 음식을 하나 가득 담아 주는 것이다. 우린 하릴없이 그 백을 들고 숙소의 부엌으로 가서 열어 보니 완전 인스탄트 음식으로 꽉 차 있었다. 플라스틱 통에 담긴 샐러드와 닭고기 요리, 빵과 버터, 과일 몇 개...... 더구나 닭고기는 전자렌지에 뎁혀 먹어야하는 것이다. 너무 맛이 없어 우린 거의 남기고 빵과 샐러드만 좀 먹었다. 너무 기대를 했나, 실망이 크다.
먹고 걷고 자고...... 반복되는 단순한 생활을 해서일까. 아니면 원래 인간의 삶에 음식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 것일까.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찼던 하루가 인스탄트 음식으로 바람이 다 빠져버렸다. 평소 나는 내가 형이상학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늘 배부르게 먹으니 부족함이 없어 잘난 척 한 게 확실하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너무나 행복하고, 하루의 피로가 다 보상받는 것 같고, 하느님의 사랑도 넘쳐나는 것만 같다. 굶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한끼 식사의 불만족에 이토록 바람빠진 풍선이 되어버리다니, 나는 완전 형이하학적인 사람임에 틀림 없다.
집으로 돌아가면 따뜻하고 맛있는 수프를 많이많이 끓여 먹어야지, 침을 삼키며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