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웃던 GR65

만 65세 할머니의 몸부림친 여행기 28

by 꿈돌

< 언니야 >

7/2 화요일

나바행스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리쵸스(Lichos)까지는 15킬로미터. 내가 좀 많이 힘들어하는 걸 본 언니야가 갑자기 앞에 매던 작은 크로스 가방을 내게 주면서 나는 이것만 매고 걸으란다. 최소한 만큼만 넣고 나머지는 자신의 가방에 내 짐을 넣으라는 거다. 자신도 웬만한 짐은 모두 큰 가방에 넣어 배달시키니 자기 가방도 그리 무겁지 않단다. 걱정 없다며 내켜해하지 않는 내게 종주먹을 대며 말했다.

“한번 해보고 아니면 담 번에 하지 않으면 되잖아!'” 안 그래도 나 때문에 빨리 걷지도 못하는 언니야에게 짐까지 지게 한다는 게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달랑 손바닥 두개 합친 것 같은 크기의 가방에 물과 지갑, 그리고 발바닥 단도리 할 것만 넣고, 언니야 가방에 내 우비 윗도리와 깔개, 얇은 잠바와 내 샌드위치 까지 넣고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깨달았다. 오늘 15키로를 걷고 말겠다는 언니야의 의지를 말이다. 언니야는 벌써 저만큼 앞서 걸어간다. 작은 배낭이라고는 하지만 두툼한 배낭을 매고 어찌 저리 빨리 걸을 수 있는지? 한참을 앞서가다 내가 안보이면 기다려 준다. 언니야가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을 때는 내가 앞서가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금방 따라 잡히기 때문이다. 길이 그리 험하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락가락해서 많이 질척거렸다. 해가 나다가 비가 내리기도 한다. 우비를 입다가, 바람불면 잠바를 입다가... 올랐다가 내려 갔다를 반복하며 중간에 쉬기도 하고, 샌드위치도 먹고 과일도 먹었다. 전부 언니야의 가방 속에서 나왔다. 내 가방 속에선 손톱 깎기 (이것도 언니야가 준거임) 하나 꺼내 쉬는 중에 앉아 깎았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고맙다 미안하단 말조차 꺼내기가 염치없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완전 언니야의 짐이다. 늦게 걷는 건 뭐 말할 것도 없고, 준비도 엉성해서 중간에 새로 사느라 돌아다닌 곳도 많았다. 등산화를 개비했을 땐 신고 다닌 신발이 아들이 사준 거라 버릴 수가 없어 우체국까지 찾아가 부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모든 준비를 언니야가 했기에 어디를 가나 언니야만 쳐다보며 나는 따라다녔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는 거다. 다음 마을로 가기 전날 저녁이면 언니야는 가야할 마을에 대한 정보를 내게 읽어 주었다. 사실 가기 전에 다 공부했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 나는 나중에는 언니야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기로 하고 사진도 안 찍었다. 언니야는 뭐든 내게 없는 것은 다 내어 주었다. 발이 아프다니 푹신한 언니의 양말과 아로마 향과 근육통에 바르는 약과 심지어는 마시는 물까지 선뜻 다 나눠주었다. 내가 물을 챙기는 걸 잊은 게 서너번은 되었는데, 한 번도 왜 물을 자꾸 잊어버리느냐고 질책도 않을 뿐더러, 아침에 물 챙기는 거 잊지 말라는 얘기조차도 안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길을 걷다가 물을 나눠 먹는다는 건 사실 생명수를 나누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먼길을 갈수록 짐이 무거우니, 등산화 끈도 잘라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게에 민감해 지는데, 내 짐을 들어주기까지...... 결국 작은 크로스 가방도 내 것이 되었다. 중간 중간에 사먹는 밥값이라도 내가 내게 해달라고 했건만, 내가 한번이라도 더 낼 양이면 눈을 부라리며 언니야가 내곤 했다.

언니야를 만난 건 18년 쯤 되었나. 걷기 동호회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측은지심이 많은 언니야는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며 또한 그들에게 베풀고 나누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베풀고 나누었을 때 생색을 내거나, 댓가를 바라거나, 아니면 내가 이런 사람임을 은근히(?) 내세우기 마련이다. 언니야의 진짜 속내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 언니야는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다. 우리 동호회 사람들 뿐만아니라 식구들은 물론이고 자기 친척들, 자기 형제 자매들, 남편의 형제 자매들, 그 자식들까지 두루 두루 다 챙긴다. 언니야의 그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러다 어느 날 언니야가 말했다. 한번은 집 안에 너무 속상한 일이 있어, 집을 나와 꽃동네에 갔단다. 거기서 오랫동안 봉사를 했는데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개 남녀노소 운신을 못하는 사람들이란다. 언니야는 그중에서도 중환자들이 누워있는 방에서 그들을 먹이고 씻기고 오줌똥 치우고 재우는 일을 했단다. 쌓인 수건들을 손빨래 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언니야를 보며 그 시간을 건너온 언니야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나역시 와상으로 누우신 시어머님을 10년이상 간병했지만 내겐 간병하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있었다. 간병인에게 다 맡기고 싶지않아 어머님 오신 처음 석달은 간병인 없이 낮에는 내가, 밤에는 남편이 어머님을 돌보았다. 간병인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주머니가 오시자 썩션부터 상처 소독, 2시간마다 돌아눕히기, 일회용 비닐 장갑을 끼고 바셀린을 바르고 어머니 대변을 뽑아내는 일까지 다 가르쳐야했다. 그리곤 아침이면 수간호사처럼 어머님 방에 들어가 남편이 만들어준 챠트를 체크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살았던것 같다. 해야할 일이니까. 그땐 지금처럼 요양병원도 많이 없을때였다. 아무튼 남편이 많은 부분을 함께 감당해주었기에 그 시간을 잘 넘겨온 것이다. 누군가와 맞잡고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언덕임을 알기에, 혼자서 묵묵히 견뎌온 언니야의 그시간이 내겐 더 아프게 다가왔다.

언니야의 많은 얘기를 들으며 언니야의 믿음의 힘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래 생각해서 머리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오래도록 들어 배움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몸소 겪고 체험에서 나온 뼈 아픈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라면 애초에 나 같은 사람과 함께 여행 가려고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0일을 같이 다니는데 이런 내게 대놓고 짜증도 한번 내지 않았다. 나는 정말 편안하게 여행했다. 한 사람이 편안했다는 건 다른 한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는 얘기다.

언니야에게 도움은 커녕 짐만 되니 너무 미안하고 감사하다. 이런 언니야를 보내주신 그분께는 또 얼마나 감사한지!! 도대체 내가 뭐라고!!


짐이 가벼워서 인지 무사히 리쵸스까지 잘 왔다. 우린 도착해서 샤워하고, 서로 몸의 앞뒤를 침뜸 해주고 쉬었다. 몸 전체를 앞뒤로 침을 놓고 뜸을 뜨기는 참말로 오랜만이다. 보약을 먹은 듯 든든하다. 내일은 19키로를 걷는다고 한다. 내일은 아무래도 가방을 매야겠다고 하니 그럼 언니야 가방을 한 번씩 매란다. 될 수 있음 큰 배낭에 짐을 보내고 최소한으로 매는 게 좋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내일은 샌드위치도 없으니 언니야 가방도 뭐가 없어 가볍단다. 오케이! 아무래도 내가 잘 걷는 게 언니야를 젤로 도와주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