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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적 존재 인간

욕망, 통제, 갈등, 선택, 진보

by THE RISING SUN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갈등한다. 눈앞의 이익과 장기적인 목표 사이, 감정과 이성 사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우리는 언제나 갈라진 길 앞에 서 있다. 이는 단순히 외부 환경이 복잡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내부에 충돌하는 두 가지 회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과 통제, 본능과 이성, 추진력과 절제가 하나의 뇌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그 충돌의 정체는 도파민이다. 인간은 외부의 딜레마적 상황이 아니라, 내부의 화학적 충돌로 인해 딜레마에 빠지는 존재다. 딜레마는 외부보다 내부에 있다.


도파민은 인간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 호르몬은 보상이 예상될 때 분비되며, 새로운 것, 낯선 것, 도전적인 것에 반응한다. 기대감이 도파민의 연료다. 하지만 도파민은 만족하지 않는다. 이미 손에 넣은 것은 도파민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손에 넣은 순간, 도파민은 식는다. 따라서 도파민형 인간은 항상 미래를 갈망하며 현재를 불만족스러워한다. 그들에게 현실은 준비단계일 뿐이다. 끝없는 추구와 기대, 그리고 실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하지만 도파민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우리를 즉각적으로 흥분시키는 욕망 회로, 다른 하나는 목표를 위해 절제하게 만드는 통제 회로다. 두 회로는 하나의 물질로 엇갈린 신호를 보내며, 인간 내부의 갈등을 유발한다. 도파민이 부족하면 무기력하지만, 지나치게 우세하면 중독과 강박으로 흐른다. 억제하지 못하면 충동에 사로잡히고, 지나치게 억제하면 삶은 무미건조해진다. 인간은 도파민 덕분에 문명을 세웠고, 도파민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한다. 이 딜레마는 생존을 위한 진화적 설계다.


도파민은 진화의 산물이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해야 했다. 과거에 만족했다면 새로운 땅을 개척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파민은 미래지향적 호르몬으로,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를 부추겼다. 문명은 그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 강력한 시스템은 현대 사회에서 쉽게 폭주한다. 충분히 가진 사람조차 더 많이 가지려 한다. 경쟁, 소비, 명예, 권력은 모두 도파민의 언어다. 그리고 도파민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쾌락을 좇는 존재가 아니다. 욕망을 통제하려는 존재다. 전두엽은 도파민이 만든 갈망에 ‘이것이 진짜 가치 있는가?’를 묻는다. 이 통제 회로는 우리가 짐승이 되지 않도록 붙잡아준다. 하지만 이 회로 역시 도파민의 영역이다. 통제조차도 욕망에 의해 작동된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지금을 견딘다는 통제는 결국 또 다른 욕망의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자신 안에서 대립한다. 가야만 하는 욕망과 멈춰야 하는 이성, 그 사이에서 삶은 전개된다.


현대 사회는 도파민이 만든 딜레마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SNS는 끊임없는 비교를 자극하고, 알고리즘은 끊임없는 새로움을 던져준다. 우리는 매 순간 ‘지금 이걸 더 해야 하나, 멈춰야 하나’를 고민한다. 더 많은 자극, 더 강한 도전, 더 특별한 경험을 갈망하지만, 그 끝엔 공허함이 남는다. 중독과 탈진, 무기력과 피로는 도파민의 반작용이다. 도파민은 우리를 끌고 가지만, 어디까지 가야 만족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이 딜레마적 존재인 이유다.


직업 세계에서도 인간의 딜레마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살리고 싶지만 병원 시스템과 비용의 제약을 마주한다. 판사는 정의를 세우고 싶지만 법과 현실의 간극에 고뇌한다. 정치인은 민심을 따르려 하지만 동시에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 이들 모두는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이익, 이상과 현실, 의무와 자아실현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한다. 이는 단순한 직업적 갈등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도파민이 만들어낸 구조적 충돌이다.


연애와 가족, 친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설렘과 애정이 최고조일 땐 도파민이 지배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도파민은 사라지고, 옥시토닌과 세로토닌 같은 현실 감정이 관계를 지탱한다. 사람들은 종종 “사랑이 식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도파민의 역할이 끝났다는 뜻일 뿐이다. 진짜 관계는 도파민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단계를 기다리지 못한다.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아 떠나고, 또다시 같은 순환을 반복한다.


흥미롭게도 정치 성향조차 도파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보수주의자는 세로토닌과 옥시토닌이 활성화된 상태에서 안정과 질서를 중시한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도파민 우세형으로 미래, 변화, 가능성에 민감하다. 한 사회가 갈등하는 이유도, 어쩌면 서로 다른 신경전달물질의 충돌 때문일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선택도, 그 사람의 뇌가 만들어낸 반응일 뿐이다. 판단이 전제되는 이해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찰, 설득보다 공존이 필요한 이유다.


결국 인간은 하나의 분자가 만든 시스템 위에 서 있다. 도파민은 인간을 진보하게 했고, 동시에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게 맞는가”를 자문하며 살지만, 그 질문 자체도 도파민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질문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딜레마는 인간의 약점이 아니라, 인간됨의 조건이다. 욕망과 절제 사이, 미래와 현재 사이, 인간은 균형을 찾아 나아가는 생명체다.


도파민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지만, 인간을 붙잡아주는 건 도파민 혼자가 아니다. 관계의 유대와 신뢰를 형성하는 옥시토닌,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는 세로토닌, 그리고 쾌락과 통증 완화를 주는 엔도르핀은 도파민의 파트너이자 균형자다. 도파민이 “더”를 외칠 때, 옥시토닌은 “함께”를 말하고, 세로토닌은 “지금도 괜찮아”를 속삭이며, 엔도르핀은 “충분히 즐겼다”고 달랜다. 이 호르몬들이 조화롭게 작동할 때 인간은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도파민만이 과도하게 활성화될 경우, 관계는 수단이 되고, 삶은 추구만 남는다.


현대 사회는 도파민 중심적이다. 효율, 성과, 혁신, 경쟁은 모두 도파민을 자극하는 코드다. 하지만 이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고립, 중독과 탈진을 겪는다. 해결책은 다른 호르몬의 회로를 회복하는 데 있다. 옥시토닌은 타인과의 신뢰와 공감, 세로토닌은 자존감과 소속감, 엔도르핀은 일상 속의 기쁨에서 생성된다. 즉, 빠르게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함께 머무는 것이 해독제다. 인간은 단독자로 진화하지 않았다. 관계 안에서, 리듬 안에서 균형 잡힌 생명체로 설계되었다.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장 먼저, 자신의 뇌 속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욕망은 나의 적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다만 욕망을 자각하지 못한 채 끌려갈 때 인간은 파괴된다. 욕망은 인정하되, 통제하라. 도파민의 속도에만 귀를 기울이지 말고, 세로토닌의 안정감과 옥시토닌의 따뜻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내면의 목소리 중 어느 것에 집중할지를 선택하고 있는 존재다.


결국 인간의 바람직한 삶은 조화에 있다. 도파민의 추구, 옥시토닌의 관계, 세로토닌의 평온, 엔도르핀의 회복이 유기적으로 엮일 때, 우리는 딜레마를 넘어 균형의 존재로 성장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존재다. 그러나 그 모순을 직시하고, 갈등을 품은 채 살아가는 태도에 품격이 있다. 딜레마를 겪는다고 실패가 아니다. 딜레마 속에서 스스로를 통찰하고 구성해 나가는 것이 인간다움이다. 그것이 우리가 도파민적 존재를 넘어 ‘의식적 존재’로 나아가는 길이다. 특히 정치를 하려는 자,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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