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

by 다람

겸손이 동양적인 미덕이라지만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다. 서양 철학의 교조라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자처했으니 말이다.



진정한 겸손은 메타인지에서 나온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지에 대한 정확한 자각이 있는 자라면 자연스레 겸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지력은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 오늘날 최첨단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 문명마저도 밝혀낸 것이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뉴턴은 "과학이 밝혀낸 것은 어린 아이가 모래 사장에서 조가비 하나를 주운 것과 같다"는 말을 했다.



예컨대 PTSD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놀랍게도 겨우 40년 남짓에 불과하다. 월남전이 결정적 계기였다.



ADHD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고 뇌 과학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다.



많은 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설적이게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가능성을 잉태한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상당수 많은 이들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생각에 젖어 일말의 의심없이 확답을 내리곤 한다. 한 문제에 대해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이리저리 다른 각도에서, 때로는 전방위적, 전위적으로 비틀어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손쉽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세상의 큰 비극은 우리가 모르는 부분보다는 정작 우리가 안다고 착각할 때 벌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주로 협소한 내 경험에 바탕하지만 많이 읽고, 보고 들은 이들일 수록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말이지 답답할 정도로 고심하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많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이미 머리 속에 염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유부단마저 느껴질 정도로 속 터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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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동묘나 탑골 공원의 노인들을 유심히 관찰하면 그들은 답을 내리는 데 거침이 없다.



언제나 큰 목소리로 삿대질하며 "무조건 내 말이 맞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속 시원하고 명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쉽사리 결코 신뢰할 수는 없다.



내가 어리석어서인지 어린 시절의 나는 쉽사리 확답을 내리는 이들에게 번번이 당해왔다.



다행히도 물질적 손해나 일반적 사기를 당했다는 것은 아니었으니 지적 사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사실상 '무언가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의 뻔뻔한 당당함에 속아왔던 것이다. 사실 사기로서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



본디 사기라 함은 의도적으로 남을 속인다는 뜻인데 당당하게 일갈하는 그들조차도 잘못된 정보를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잘못된지 인지조차 못했다는 의미다.



언제부터인가 '메타인지'가 시대의 트렌드가 되었다. 시대의 트렌드가 되었다는 의미는 그전까지는 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메타인지'가 새로운 발상이나 개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메타인지의 원조랄 수 있는 소크라테스가 있었고 하다못해 공자도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라고 했다.



사실상 2,500년 전 이야기들을 다시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죽었지만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역시 앞서 말한 것과 동어반복이겠지만 철저히 내 협소한 경험에 따르자면 한국인들은 "모른다"라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부끄러워하는 측면이 있다.



모르는 순간 무시당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모르는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기 보다는 무시하고 조롱하며 낮은 등급으로 매겨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이 나라 자체가 등급과 계급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학력과 재력, 외모로 사람을 재단하는 것이 암묵적 국룰 아닌가? 이런 판국에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을 해야 하는 것이 외려 살아남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다.



이러한 국민성은 메타인지가 확립되기 어려운 악순환을 만든다. 몰라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라면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자연스레 박탈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이를 교묘하게 악용한 거짓 지적 사기가 판을 친다. 뭔가 삐까뻔쩍해보이면 왠지 있어보여 집단으로 추종하는 격이다.



사실상 파시즘에 가까운 나라이며 여러 샤머니즘, 종교에 가까운 팬덤 정치가 난립하기 가장 좋은 구조다.



혹여나 용기있는 개인이, 이 광기에 정면 대항하기라도 하면 떼로 달려들어 마구 짓밟는 식이다.



어쩌면 제일 큰 비극은 내가 한국인들을 잘 믿지 못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봐 왔던 많은 이들이 마치 올곧은 신념처럼 여기던 생각이나 가치관을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것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는 언제나 사회적 트렌드가 있었다. 결코 겸손한 발언은 아니지만, 그리고 감히 내 주제에 함부로 지껄일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지만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그다지 생각이 없다는 인상을 적지 않게 받는다.



결코 한국인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주체성이나 곤조의 박약에 그 기원이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와 유행이 급속도로 변해도 끝까지 견지하는 그런 정신이 다소 부족한 것 같다.



어느 무언가가 '핫'하기라도 하면 무지성적으로 집단이 몰리는 것이다. 코인이든 뭐든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옛 속담처럼 남들 장 간다고 거름 지고 따라가는 격이다.



반면 유태인들의 마르지 않는 정신적 샘 <탈무드>에는 "모두가 한 곳으로 몰리면 배는 가라 앉는다"라는 격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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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가 합리적인 생각이라면 다양한 주장들을 포용하겠다는 뜻이다. 훗날 그 생각의 결과는 우리 모두 다 잘 안다.



당장 노벨상 수상자가 한국인이 많은지 유태인이 많은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삼척동자도 안다.



물론 노벨상이 지적 수준의 모든 잣대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금융 자본을 비롯한 문화 예술, 과학에 걸친 그들의 전방위적인 세계적 영향력은 우리가 감히 따라잡을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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