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 기타리스트들이 음악적 벽에 막힐 때 블루스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록 음악은 전적으로 흑인 블루스 뿌리에 기반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블루스는 음악적 창의성의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것이다.
내게 창의성의 원천은 비틀즈와 지미 핸드릭스다. 물론 나는 음악가가 아닐뿐더러 심지어는 음악의 ‘ㅇ’ 자도 모르는 무지랭이다.
그저 멜로디에서 삶의 영감을 조금이나마 얻는다는 뜻이다.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뭔가 어지럽게 얽혀있는 난제 앞에서 답이 없을 때 비틀즈를 듣거나 지미 핸드릭스를 듣는다. 상당수가 해결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뻥이지만 실제로 몇몇 부분에서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효과가 있기도 했다. 아예 뻘소리는 아닌 것이다.
그 이유를 찾자면 천재들이 만든 멜로디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듣기만 하면 지능 지수가 올라갔다는 모차르트 효과 같은 그런 해괴한 사이비 논리가 아니라 비틀즈나 지미 핸드릭스같은 천재들이 멜로디를 어떻게 풀어갔는가? 혹은 조성했는가?를 나름 연상하면서 들으면 그들의 생각 구조 내지는 조합 능력 같은 것이 무의식적으로 내게 틈입해 약간의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이자 추측.
지미 핸드릭스의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voodoo child>나 <purple haze>가 아니라 <power to love>다. <power to love>를 들으면 컨버스를 신고 펄쩍 펄쩍 뛰며 피크가 갈릴 정도로 일렉 기타를 치며 버스킹하는 소년이 떠오른다. 자유의 상징이자 여유로운 그루브가 일품인 곡이다.
내게는 왼손 펜더 스트라토 캐스터와 레스폴이 있다. 다만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을 상기해야한다. 비싼 물건을 사놓고 감상만 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기타리스트들의 애용품 컨버스 신발도 신을 수가 없다. 내 발볼은 네안데르탈인에 필적할 정도로 넓기 때문이다. 컨버스는 전적으로 서구인의 발볼 사이즈에 맞춰있다. 칼발에 가까운 컨버스를 일반 동양인보다 더 넓은 발볼을 지닌 내가 신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컨버스는 미친놈들이다. 끝끝내 서양인의 칼발 사이즈를 고수하며 동양에서 물건을 팔아먹겠다는 심보가 그것이다. 컨버스가 미친놈들이면 한국인들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호구다.
하다못해 컨버스에 발볼이라도 넓게 만들어달라 항의조차 안하거나 못한 모지리들이다. 중국처럼 개떼로 항의했으면 컨버스가 알아서 넙죽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은 구글과 애플의 콧대마저 무너뜨린 나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