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이라는 단어가 지성계에 화두가 된 지는 오래다. 내 알량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이 협소한 남조선에선 최재천 교수가 아마 그 시발점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그게 진리다.
어떤 역사적 서술을 할 때 단순히 사료적 기록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발견, 과거의 생태 환경과 기후, 정치적 구조, 심지어는 천문학이나 개인 심리학까지 총동원해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전방위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안을 접근할 때 단순히 한 방식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통합적 사고 능력이 필요하다. 문과, 이과가 따로 놀지 않고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걸 제일 잘 한 사람들이 '총균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다.
잠자코 읽다보면 정말 이것까지 건드려야 하나 싶을 정도로 다층적인 방식을 섞어 접근한다.
그들은 통섭이 대중 트렌드가 되기 이전에 일찌감치 동물적 감각으로 이를 체화했던 인물들이었다. 우리 모두 결과는 잘 안다.
이들은 세계적 거장이자 석학으로 우뚝 섰다.
한국 정치계는 문과의 입김이 세다. 법조계나 시민 단체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서슴지 않고 국회의원, 장차관 자리를 꿰찬다. 주로 글과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윗대가리에 있으니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리가 없다.
반면 중국 정치 엘리트는 이공계 출신들이 장악했다.
당장 '유럽의 왕'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만 해도 이과 출신이다. 강대국들의 수장이 이과 출신이라는 것은 그저 논리 비약을 넘어 어느 정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과 출신이 글을 못 쓴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쉽사리 믿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논설문에 있어서는 이과가 문과를 압살한다.
이건 그저 내 뇌피셜이 아니라 실제로 이들을 지도한 교수들이 밝힌 엄연한 진실이다. 탄탄한 로직이 이미 머리 속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글도 잘 쓰는 것이다.
"이과는 감성이 없다"라는 말만큼 병신 같은 소리가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치들은 대개 그저 듣기 좋은 미문이나 예쁜 싸구려 글쓰기만 추종하는 부류들이 많다. 사고 수준이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만 모른다.
일견 문과를 처참히 짓밟은 것처럼 보였다면 사과하겠다. 고백하건대 당장 이런 말을 내뱉는 나조차도 정작 취업 안되기로 유명한 문과충이다.
물론 이과가 감히 문과를 흉내낼 수 없는 탁월한 부분도 있다. 누가 옳다 누가 더 뛰어나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고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자는 의미다.
우리나라 옛 동화엔 아름다운 미담들이 많은데 움직일 수 없는 앉은뱅이와 볼 수 없는 소경이 합심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훌륭한 예시가 있다.
소경의 등에 올라탄 앉은뱅이가 그의 눈을 대신하고 앉은뱅이의 불편한 몸을 소경이 대신하는 격이다. 어렵고 난해한 수사를 굳이 붙일 필요도 없이 이게 통섭이다.
나는 지식인이 아니므로 통섭보다 더 쉬운 표현을 쓰겠다. 굳이 내 식대로 단어를 표현하자면 통섭 대신 병행이다. 이론과 실재가 같이 가야한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전혀 상관 없을 법한 원시와 최첨단 역시 병행해야 한다.
아주 오래 전에 본 mbc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서 언젠가 한번 주병진 씨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는 탁월한 지능 덕에 방송인으로 대성공을 거둔 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속옷 사업에 뛰어든다. 아재들은 다 아는 그 유명한 '보디가드'라는 회사가 그 장본인이다.
마케팅은 나름 열심히 공부했는데 속옷이 도무지 팔리지 않았다. 재고만 쌓여 파리만 폴폴 날리던 와중 어느날 경쟁사 속옷 회사에서 집단 해고를 당한 이들이 주병진 씨를 찾아온다.
"우리들이 완판시키겠다"며 호언장담하는 것이다.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마케팅 전문가도 아닌 그들이 그다지 못 미더웠지만 주 씨도 딱히 방도가 없었으니 속는 셈치고 맡겨본다.
결과는?
놀랍게도 순식간에 쌓인 재고들을 한달만에 다 팔아 해치웠다.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상아탑의 이론이 현장의 실전 감각을 이길 수 없다는 사례다.
비슷한 예는 또 있다.
노가다계의 대부 정주영 회장이 한창 현대 건설로 짭짤한 돈을 만질 때, 어느 공사판에서 젊은 청년과 늙은 인부의 다툼이 있었다.
청년은 서울대에서 건설 이론을 배운 엘리트였고 인부는 평생을 공사판에 몸 담은 달인이었다.
일류 학교에서 배운대로 주장하는 젊은이와 몸으로 겪은 경험을 주장하는 노인의 날 선 대치는 머지 않아 정 회장의 중재로 싱겁게 끝이 난다.
정 회장은 서울대 출신 청년에게 먼저 삽질하는 법부터 배우라고 충고한다. 학교에서 이론을 충분히 배웠으니 이제는 실재를 경험해보라는 의미다.
노인의 말이 맞았는지 청년의 말이 맞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이론과 실재를 병행해야 한다고 믿었던 정 회장의 훌륭한 통찰이다.
나는 살면서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황당하게도 어처구니없이 멍청한 판단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오만의 역설이다.
반면 무학의 이름도 없는 촌부가 놀랍게도 경험에서 우러난 훌륭한 지혜를 보이는 경우도 봤다.
모든 것은 변칙적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촌부에게는 폭넓은 제반 지식이 없고 인텔리들에게는 현장 경험이 없다. 결론은 뭔가? 소경과 앉은뱅이의 동화처럼 함께 손 잡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원시와 첨단도 마찬가지다. 프롬프터만 입력하면 뭐든지 뚝딱 만들어 내는 인공지능 AI 시대에 오히려 필요한 것은 고전이나 양서를 통한 가장 아날로직한 지적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계에 비해 여전히 불완전하고 다소 서투를지언정 순수히 인간의 자력으로 무언가를 이해하고 사유하는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지능이라는 도구를 더 지능적으로 활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 이야기가 별달리 새로울 것도 없다. 이는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안다라는 의미의 사자성어 '온고지신' 변주에 다름 아니다. 옛 성현들의 지혜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최재천 교수가 통섭을 외친다면 나는 병행을 외치겠다. 공교롭게도 그는 아주 까마득한 고교 선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