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무한한 아량이 있어 혹여 다시 열아홉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네 가지만 하겠다. 영어 공부, 수학 공부, 악기 연주, 격투기 수련이 그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시절 나는 영포자, 수포자였다. 그것들이 지독하게 재미도 없었을 뿐더러 일말의 지적인 감흥조차 주지 못 했기 때문이다. 만약 학창 시절 수학 선생이 파인만이었다면 이야기는 조금이나마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영어는 말 할 것도 없다. 기억을 돌이켜 보면 오늘내일하는 비쩍꼻은 60대 노인 선생이 <성문 종합 영어>를 익숙하게 옆구리에 파지하고 그야말로 1970년대 방식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지독하게 서투른 일본식 영어 발음은 덤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양반이 외국인과 대화라도 한다면 그 구닥다리 발음을 현지인이 알아들을 수 있었을런지 여전히 의문이다.
당시에 영어로 외국인 여자를 꼬실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알기라도 했다면 아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 해 언어 공부에 매진했겠지만 저열하고 구태적인 한국 교육 여건상 그건 불가능했다. 일말의 동기부여조차 없었던 것이다.
수학은 그렇다치더라도 영어 공부를 등한시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나름의 곤조 때문이었다. 태어나 세상을 처음 인지하면서부터 가졌던 내 꿈은 오로지 작가였다. 글쓰기에 있어 타국의 언어가 한국어의 순수성을 훼손하리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 외국에서 꼴랑 겨우 몇 년 박사 과정 밟고 돌아와 외국물 먹은 티 팍팍 내며 혀 꼬부라진 발음을 하는 교수나 얼치기 인텔리들을 많이 봐서 그랬던 탓도 있다. 나름 변명같지만 그랬다. 하다못해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부로도 영어를 못했다. 그러고도 노벨 문학상 잘만 탔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당시 롤모델인 장정일이 있지 않았는가?
지금 그 착각을 생각하면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이다. 모국어와 이질적인 타국의 언어를 병행하면 모국어의 기능을 훼손하기는 커녕 더 풍성하고 다층적인 표현을 가져다 준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됐다.
정말이지 무엇보다도 갈증에 가까운 것은 전세계 인터넷 정보의 80%가 영어로 돼 있다는 사실. 다양하고 수준 높은 최신 정보를 접하려면 반드시 영어가 필수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주식도 영어 잘 하는 놈들이 잘 한다.
물론 요새는 시대가 좋아져서 번역기가 아주 많이 발달했지만 매번 번역기를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특히 불시에 벌어지는 외국인과 대화에 있어서 미진하다못해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대승 불교에 오염되지 않은 초기 불교 니까야 경전을 읽으려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 초기 불교를 연구하는 한국 빠알리 협회가 번역한 붓다의 말씀은 감질나는 수준이다.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다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릴 지도 의문이다. 반면 영어판은 일찌감치 니까야 전집이 발간된 지 오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초기 불교를 발굴한 이들은 인도를 식민 지배한 영국인들이었고 다양한 연구와 해석이 이뤄졌다. 흔히들 중국과 한국, 일본을 위시한 동아시아 불교가 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학구적인 연구를 하려면 외려 영국을 가야한다는 말을 어느 연구자로부터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지난 오랜 기간 한반도가 세계사 변방에 머물렀던 탓에 아주 유명 서적이 아닌 이상 외서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많지 않다. 질 좋은 양서 중 번역되지 못해 읽지 못 한다는 사실이 그저 통탄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