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조

by 다람


한국에는 신춘문예가 있고 일본에는 아쿠타가와상이 있다.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다.


물론 한강 작가의 등장으로 "신춘문예 출신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다"는 공식이 처음으로 깨지긴 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아쿠타가와상 출신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


국력의 차이만큼이나 아예 체급 자체가 다르다.


언젠가 한번은 그 절대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이 뒤집어진 사건이 있었다. 수상자를 발표했는데 정작 당사자가 "내 글은 95%를 챗 지피티로 썼다"는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사실 양심에 걸려 고백했다기보다는 "한번 엿 먹어봐라"는 심정으로 쏘아댔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부러 장난질을 친 거나 다름없다.


가지고 놀아본 것이다.


심사위원인 일본 문학계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조차 인공지능의 글쓰기를 판별할 능력이 없다는 그야말로 모골송연한 충격이었다.


그 당사자는 구단 리에라는 여류 작가이며 이 포스팅의 인물 사진이기도 하다.

일본조차 상황이 이런 판국이니 내 장담컨대 소위 작가라 자처하는 이 나라의 글쟁이 중 90% 이상은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글쓰기를 할 것이라 추측한다.


요즘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줄 때 챗지피를 사용하지 말라며 "양심에 맡긴다"라는 표현을 한다던데 나는 그 말에서 문득 오래전 학창 시절의 기억이 소환되곤 한다.


예컨대 교실에서 누군가의 귀중품이 사라졌을 때 선생은 마치 경건한 제의처럼 모든 아이들의 눈을 감게 하고 "물건을 훔쳐 간 녀석은 양심에 따라 손을 들라"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 미개했던 시대상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도저히 과학적인 물증을 찾을 수 없으니 '양심'에 맡긴다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험상 진짜 도둑놈은 양심에 따라 결코 손을 들지 않는다. 애초에 타고나기를 양심이 없어서 물건을 훔쳤을 인간에게 어처구니없게도 양심을 운운하니 이런 말도 같잖은 모순이 없다.


그러니까 그 시절 선생들은 순진했거나 멍청했거나 아니면 순진한데다 멍청했거나 셋 중 하나다.


설상가상으로 도둑놈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제서야 선생은 눈깔이 돌아가 게거품을 물며 "너희들도 다 똑같은 한패"라며 집단으로 개 패듯이 후려갈기곤 했다.


우리는 군대의 연대 책임처럼 영문도 모르고 얻어터졌다. 야만의 시대였다.


때문에 양심을 거론하는 것은 역으로 뚜렷한 물증이 없다는 무기력의 반증인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므로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너희들의 양심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현존하는 IT 기술로는 도저히 AI 표절을 분간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암산 능력이 계산기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글쓰기는 인공지능의 글쓰기를 이길 수 없다.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한 인간 지식 빅데이터를 축적해 가장 완벽한 글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인간이 밤낮으로 6개월 걸려 공들여 쓴 글을 인공지능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단 10초 만에 수백 페이지를 써갈긴다. 허망할 지경이다.


그래서 나처럼 온전히 '인간의 힘'으로만, 김훈 선생의 표현처럼 '온몸으로 밀어 가며'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끔찍하게 억울하고 답답한 측면이 있다.


내가 아무리 혼신의 힘을 들여 써도 사람들은 "이 글 역시 인공지능을 베꼈겠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은 대다수의 작가들이 실제로 거리낌 없이 베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뻔뻔하게 자기가 쓴 글인 양 지식인 행세를 한다. 이런 판국이니 충분히 대중들의 불신이 생길 법도 하다.


이제는 "내 글을 내가 직접 썼다"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기가 막힌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80년대 작가들처럼 육필로 직접 쓰는 것이다. 그다음은 육필을 구글 독스에 타자로 옮겨 나머지 글쓰기를 채워 넣는 식이다.


이 아이디어는 예일대 여학생 논문 사건에서 얻었다. 전 세계 수재들만 모인다는 예일대에서 어느 여학생이 졸업 논문을 썼는데 어이없게도 교수가 탈락시켜 버렸다. "AI로 베꼈다"는 이유에서였다.

몇 달 동안 밤새 코피 쏟으며 글을 썼던 여학생은 황당함을 넘어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을 게다. 죽을 둥 말 둥 노력했음에도 졸업조차 못할 비극의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는 구글 독스에 썼던 기록들을 제출했다.


구글 독스는 초 단위로 글쓰기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기지 덕에 교수는 그제서야 자필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덕분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역시 예일대 출신 수재답게 슬기로운 지혜를 발휘했다. 그녀의 사례를 통해 나 역시 깨달음을 얻은 바가 있어 구글 독스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트에 육필로 적는 아날로그도 병행했다. 첨단 문명이 도리어 극단적 원시의 형태로 밀어 넣은 셈이다.


AI 시대에 온전한 인간의 글쓰기는 사실상 호구 같은 짓이다.


오죽하면 오랜 절친 막역지우 김성훈은 내게 "혼자만 병신 짓을 한다"며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마치 여성들의 성형 심리와도 비슷한 케이스다. 남들은 모두 성형을 해서 예뻐지는데 혼자만 손 안 대면 가만있어도 자연스레 미의 세계에서 낙오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울며 겨자 먹기로 남들 따라 성형을 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쌍수'는 이 시대에 성형도 아니라는 말조차 나돌지 않나.


이 나라에서 자연 미인이 드문 이유다. 그리고 그 기저 심리에는 언제나 낙오되기 싫다는 욕망이 담겨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제 내게 이렇게 물을 차례다.


"굳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쓸 이유가 있는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곤조다. 나는 태생부터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저 규칙을 맹종하고 유순하게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천성이다.


이건 전적으로 하늘이 부여한 스피릿이자 곤조다. 혹여 어설프고 남들이 비웃으리만치 수준이 떨어질지언정 내 스스로 만든 작업물에 자긍심을 느낀다.


한국에는 온갖 잡다한 문인 단체들이 우후죽순 난립해 있다. 중노년에 이르러서도 문학 소녀의 꿈을 버리지 못한 이들의 욕망을 돈벌이 삼아 코 묻은 애들 삥뜯듯 등단시켜 주는 곳이 넘쳐난다.

개나 소나 작가고 시인이다. 일류는 극히 드물고 극대다수가 3류에 지나지 않는데 더욱 가관인 건 남이 써준 글로 등단하는 경우다.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렇게 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 싶은가라는 의문이다. 그런 추접한 방식으로 통해 얻은 작가라는 타이틀이 마냥 좋은 건지 뭔지는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정치인이라면 이해를 하겠다.


그들은 애초부터 대의가 아니라 개인적 공명심이 가득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결코 정치인이 아니다. 정상적인 작가라면 수준이 어떻든 스스로가 창조한 작업물에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창작의 고통은 마치 변태의 그것과도 같아서 고통이자 동시에 쾌락과도 같은 것이다.


잡설이 길었는데 뭐 어쨌든 그렇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소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의 기술을 믿기 때문이다. 논문 표절을 집어내는 그 유명한 '카피 킬러'처럼 아직까지는 매우 미진하지만 AI 표절을 걸러내는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허술하고 완벽하지는 않아도 일단 등장했다는 점에서 꽤나 고무적이다. AI가 발전할수록 AI 표절을 밝혀내는 기술도 발전할 것이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신기술에 그냥 속수무책없이 당하거나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지만은 않는다는 뜻이다.


언젠가 먼 훗날 AI 표절 판별 기술이 발전하면 많은 거짓들이 드러날 것이다.


아날로그 시절 학력 위조를 서슴지 않고 벌였던 자들의 행적이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낱낱이 까발려졌듯 보다 발전한 AI 표절 판별 기능은 무수한 글쟁이들의 표절들을 밝혀낼 것이다.


그날이 오면 과연 그들은 어떤 변명을 할까? 반민특위 시절 친일을 변명하던 춘원 이광수처럼 "남들도 다 했으니 나 역시 죄가 없다"고 항변할 것인가?


나는 반드시 그런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도 나는 세상에 아주 뒤떨어진 병신마냥 펜슬로 A4 용지에 애써 육필을 갈겨쓰고 그것도 모자라 구글 독스까지 병행하는 그 뻘짓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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