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은이

by 다람


가수 혜은이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내 아버지뻘 연배다. 아니 큰 아버지뻘쯤 되겠다.


이 말인즉슨 시대가 달라 내가 그녀의 음악을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고딩 시절 골룸처럼 팍삭 늙은 할아버지 선생님이 계셨는데 정말 뜬금포로 수업 중 종종 혜은이를 두고 "참 미녀였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앙상하게 비쩍 마른 몸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지막히 읊조렸기에 아마 수업을 듣던 애들은 기억도 못 할 것이다.


마치 전쟁 막바지에 발광하던 도조 히데키처럼 머리를 박박 삭발한 고딩인 나는 좀처럼 선생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노년에 들어선 혜은이는 다소 후덕하고 푸짐한 체구를 자랑한다. 그저 따스한 눈매를 가진 선량한 아줌마의 인상이다.


말 한 번 섞어본 적은 없지만 왠지 직감적으로 첫인상이 참 자애롭게 느껴지는 그런 분들 있지 않는가? 단지 그뿐이다.


당시 어린 내가 보기에 '아줌마' 혜은이의 이미지에서 미녀의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우연히 그녀의 빛나는 청춘 시절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후였다. 21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유튜브 덕분이었다.


유튜브는 언제나 마구잡이로 영상을 틀어 제낀다. 사용자의 취향에 맞춘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내게는 그다지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기계가 '틀어주는 대로' 별 아무 생각 없이 본 70년대 흑백 영상 속 젊은 혜은이를 마주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대단한 미녀였기 때문이다. 군살 한 점 없는 아주 날렵한 몸매에 신이 빚은 듯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까지 "정말 동일 인물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파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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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새침하며 옥구슬 쟁반 구르듯 낭랑하다. 요즘 아이돌은 그저 가볍게 씹어 먹을만한 미모다.


나는 그제서야 20년 전 고교 시절 그 할아버지 선생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호기심이 치밀어 그녀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고 기구한 인생 역정을 알게 됐다. 남자 잘못 만나서 평생 생고생한 불운의 인물이었다. 200억 원에 가까운 재혼한 남편 빚을 갚기 위해 일류 가수가 그야말로 밑바닥 밤무대까지 전전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고지순하다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한 건 어린 시절 내가 직감적으로 느낀 첫 인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다. 두말할 것 없이 그녀는 지독하게 선량했던 인물이다.


옛 어른들 말씀처럼 남자든 여자든 짝을 잘못 만나면 인생이 꼬인다. 속된 말로 신세 조지는 것이다. 혜은이의 인상이 변한 이유가, 그 눈부신 미모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그 오랜 시간 얼마나 많은 몸 고생, 마음고생을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당대를 뜨겁게 달구던 70년대 아이유가 이제는 후덕하고 자애로운 아줌마가 되었다. 뭇남성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던 가녀린 미성의 목소리는 중후한 톤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녀를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의 공연으로 꼽는 것이 <EBS 스페이스 공감> 편이다.


아가씨 시절의 음색이 투명한 아름다움에 가까웠다면 중년의 음색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온 묵직한 파워가 압권이다.


삶의 모진 풍파를 겪은 연륜의 경험마저 진하게 녹아나 있다. 분명 밝고 흥쾌한 곡조임에도 불구하고 이면에 진한 블루스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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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를수록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스트라디바리우스처럼 혜은이의 진가는 외려 예술적 정점에 다다른 노년기의 절륜함에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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