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by 다람


가끔 답답해서 도시 교외 산을 올라가면 반드시 마주치는 군상들이 있다. 막걸리 냄새가 풀풀 풍기는 등산객 노인들이다.


주름진 손엔 조악한 중국제 싸구려 스피커가 쥐어져 있다. 정체불명의 천박한 뽕짝이 고요한 숲에서 최고 데시벨로 쩌렁쩌렁 울려댄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굳이 내색을 못할 뿐 참새들도 무지하게 신경이 거슬릴 것이다. 노인들이 악해서라기보다는 개인의 취향이 타인의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마 이어폰을 끼고 홀로 즐기면 된다는 생각조차 못 한다.


'어르신'과 '노인'은 한 끗 차이다. 대단히 단순하게도 민폐의 여부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말마따나 무지에서 악이 나오는 케이스다. 사실 극히 최근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는 민폐라는 개념이 드물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고 문제가 생기면 적당히 인간미로 때우던 시절이었다.


개인의 불편함은 언제나 예민함으로 치부 받았으며 그저 인내로 버텨야 한다는 식이었다.


앞서 서두에 밝힌 등산객 노인은 그나마 양반이다. 줄넘기를 하러 공원을 가면 벌건 대낮부터 곤드레만드레 만취한 노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허나 운동할 때마다 사사건건 참견하며 끝없이 말을 거는 경우는 나로서도 좀 난감하다. 왜 말을 걸까?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다. 한국 노인들의 빈곤율은 언론에서 그토록 떠들어 재끼듯 OECD 최악에 육박하고 고독 수준 역시 최고조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특이한 케이스다. 서구 세계가 2~300년간 점진적으로 차근차근 구축한 근대화를 한국은 불과 30~40년만에 압축시켰다. 언제나 그렇듯 벼락치기는 반드시 부작용을 수반한다.


이 나라 근현대를 겪은 대부분의 노인들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일소처럼 한평생 묵묵히 노동만 했다.


때문에 선진국의 노인들처럼 다양한 취미 즐기는 법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유희나 즐거움은 철저히 배척받았고 그저 죽어라 몸 갈아 넣어 일하는 것만이 사회적 덕목으로 여겨졌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 후과는 어떤가? 결국 노인들의 불행으로 이어졌다. 평생 일만 하다가 노화로 인해 갑자기 노동력을 상실하니 본의 아니게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남는 시간이 쏟아졌다.


게다가 사회적 인프라 박약으로 인한 고립까지 더 해져 엄청난 상실감이 추가로 따라오는 것이다. 별다른 취미가 없는 탓에 음주를 한다.


박탈감에 울분과 분노까지 한데 짬뽕으로 뒤섞여 겉잡을 수 없는 사회 문제마저 야기된다.


그러므로 외로운 노인들은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건다. 들큰하게 취해 딱히 의미 없는 훈계를 하기도 하고 딴에는 조언이랍시고 상대가 원치도 않는데 사사건건 간섭을 한다.

불행하게도 그게 유일한 낙인 것이다.


비단 나뿐 아니라 인간에게 외로움과 고독은 필연적이고 사회적인 연대를 바라기 마련이다.


한의학을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논리는 연세가 들면 '수승화강'이 안 되어 열기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레 말이 많아진다는 설명이다.


나 역시 천성적으로 말이 많은 스타일이고, 지금도 말이 많은데 나이가 들면 더 말이 많아질 것 같아 걱정이 앞서긴 한다.


옛말에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데 아직까지는 좀처럼 그럴 자신이 없다.


세월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너 나 할 것 없이 반드시 늙는다. 지금 노인을 욕하고 비난하는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그렇다면 고독을 이겨낼 방법은 없을까?


꽤 오래전 나는 EBS에서 방영한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 라이브>의 애청자였다.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이 출연해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연주를 하는 식이다.

그중에 유독 인상 깊었던 아티스트는 존 메이어다. 공연 전 짤막한 인터뷰가 이어지는 게 관례인데 존 메이어는 고독한 유년기 시절 방구석에서 너무 외로운 나머지 혼잣말을 하거나 온종일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 수화기를 붙잡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기타를 잡는 순간 놀랍게도 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말 많은 병이 치료된 셈이다.


악기에 심취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말할 생각이 안 들었다며 누군가 외로워서 떠들고 싶거든 본인의 경험을 되살려 악기를 연주해 보라는 조언을 한다.


비슷한 예가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가문이다. 이 집안은 아버지고 아들이고 할 것 없이 지독하게 과묵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중현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유전자를 그대로 빼다 박은 차남 신윤철마저 라디오에 출연하면 겨우 몇 마디를 내뱉는 수준이라 PD들은 언제나 고역에 시달린다. 말이 없으니 채워야 할 분량이 한참 남아돌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들은 기타 연주로 말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통한의 감정을 모조리 악기로 쏟아 풀어내기에 정작 현실에서는 하고 싶은 말이 그다지 별로 없는 것이다.


이 방식을 고독한 우리나라 노인들에게 적용하면 신체 활동과 악기 연주가 고독감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다는 결과가 도출된다.


만약 내가 언젠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될 수만 있다면(그러니까 여기서 '만약'이라는 의미는 내가 그때까지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란 일말의 회의감이다) 고주망태로 낯모르는 이를 귀찮게 붙잡고 떠들 바엔 미디와 기타, 디제잉을 배우겠다.


음악을 열심히 배워 온종일 버스킹 하고 싶다. 미래의 음악은 어떤 사조가 유행할지 모르니 그것마저 익히겠다.


온고지신의 마음가짐으로 내 시대의 음악과 미래 세대의 음악을 섞어 보겠다.


혹여 내 늙은 목소리가 듣기 싫다면 연주만 해도 그만이다.


물론 애초에 재능이 없으니 전문 음악가가 되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그저 취미 수준으로 해보겠다는 의미다.


그러면 노년기에 들어도 사람들에게 덜 민폐를 끼칠 것이며 더불어 외로움이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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