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종

by 다람


한때는 내게도 싱싱하고 새파랬던 청춘 시절이 있었다. 대략 스물다섯 살 즈음이었을까? 정말 어쩌다 우연한 루트로 한예종 연출과 한 살 연상의 누나를 알게 됐다.


첫인상에서 이어령이 만든 국립예술대학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온몸에서 한가득 풍겨왔다.


오밀조밀한 외모는 아주 마음에 들었으나 그놈의 콧대 높은 싸가지가 문제였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나를 아주 은근히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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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글을 볼 때마다 아주 잘근잘근 씹어댔다. 이 부분은 문제가 있고 저 부분은 구성이 엉망진창이다라는 식이다.


100편을 보여주면 100편을 다 깠다. 나는 마치 타이슨에게 맥없이 얻어 터지는 복서의 느낌을 받았다.


물론 분명 논리적으로 충분히 납득될만한 합리적 비판도 있었으나 좀체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냥 내가 싫어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뭐 하긴 문창과 출신도 아닌 내가 감히 뭘 알겠는가?


다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 부아가 치미는 건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느 날은 나름의 묘책을 생각했다.


한번은 마치 선생에게 곱게 숙제 검사받는 유순한 학생처럼 순종하며 납작 엎드려 그녀에게 내 글을 바쳤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기다렸다는 듯 예쁜 얼굴과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그 악랄한 입으로 또다시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글이 너무 비관적이고 딱딱하며 방향이 두서없이 종잡을 수 없다"며 "전형적으로 전문 문학 교육을 못 받은 느낌이 난다"고, 마지막이 백미였다. "이 문장은 블랙 코미디처럼 웃으라고 만든 장치니?"라고 매섭게 쏘아붙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나는 주눅 들기는커녕 얼큰한 아재의 표정처럼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사실 그 글은 내 글이 아니라 조지 오웰의 산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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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끝끝내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병신 같게도 그녀를 좋아했기에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만약 순순히 사실을 실토했을 경우 지가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부끄러움에 방에서 이불킥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한예종이라 한들 감히 조지 오웰에 비빌 수가 있겠는가? 하다못해 그 학교 전 총장이었던 황지우 시인이 위대한지 조지 오웰이 위대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뭐 물론 예술에는 그 어떤 차등이 없다는 식의 한낱 이상주의 맹탕 같은 상대주의자, 소피스트 같은 인간들에게는 이 말이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말이다.


여튼 순정파인 내가 지를 지켜주고 싶었던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 쓰레기 같은 년은 어디선가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테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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