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존경하는 선생님의 소개로 어느 대학원생과 소개팅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카톡으로 첫 만남을 커피숍에서 짧게 갖자 제안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내 스스로에 대한 큰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서로가 실망한 상태에서 첫 만남을 비싼 레스토랑에서 잡으면 괜한 낭비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면대 면으로 마주했을 때 내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그녀의 표정에서 약간의 실망한 기색이 느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역시 그녀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소 닭 보듯 창밖 풍경이나 감상하며 서로 맹탕 같은 개소리로 시간을 떼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 낭비라 생각해서 나는 "많이 바쁘실 것 같은데 그만 갈까요?"라고 말했다.
어차피 서로 맘도 없는 것 같으니 그냥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주무시라고 우회적으로 돌려 말한 셈이다.
그녀 역시 "바쁘지는 않은데 약속이 있어서요."라며 화답했다. 지도 집에 가고 싶다는 의미다.
우연히 가는 길목이 일치해서 얼결에 같이 걸었다. 지금은 강남으로 이전한 풍문여고 길을 거쳐 경복궁까지 걸었다.
돈키호테마냥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괜히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문득 뜬금포로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실래요?"라고 물었다.
그냥 툭 던진 말이었고 아님 말고라는 심정이었다. 내가 은근한 또라이 기질이 있다.
"좋아요!"
의외의 반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어찌저찌 경복궁 서촌 후줄근한 전집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막걸리 병을 휘휘 돌리며 섞는 그녀의 폼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한두 번 마셔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주당이었다. 술을 무슨 물 마시듯 끝없이 들이켰다. 정말 일말의 사심도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대단히 편했다.
안주에는 거의 손도 안 댔지만 빈 막걸리통만 무려 10병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렇게 쳐 마시고도 아주 멀쩡한 그녀의 간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담 평소에는 얼마나 마신다는 것인지 좀체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반면 나는 이미 불콰하게 취한 채 맛탱이가 갔다.
이제 막 볼이 발그레 진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만난 지 무려 다섯 시간 만에 그제서야 터져 나온 말이었다.
나는 잔뜩 혀 꼬부라진 말투로 "아담하거나 혹은 통통한 귀염상을 좋아해요. 그냥 맘씨만 고우면 제일이죠."라고 맥없이 말했다.
나도 내가 뭔 소리를 지껄였는지 당최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고주망태였다.
반대로 이젠 내가 물을 차례였다.
"그럼 미영 씨는요?"
"저는 남자 외모는 안 봐요. 다만....."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만"을 시발점으로 이상형의 조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슨 속사포 래퍼처럼 폭풍 같은 조건들을 읊어댔다.
"저는 일단 존경할 수 있는 남자가 좋아요. 적당한 경제력에, 동물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자기 일에 심취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껴요. 예술적인 소양도 있음 좋겠고 다양한 인맥과 일정적인 위치도 있었음 좋겠고 아! 그리고 무조건 비흡연자여야 하고 남자다운 패기도 있었음 좋겠고 음식 취향도 담백했으면 좋겠어요. 언변도 좋았음 좋겠고 마지막으로 오로지 나만 바라봐 주는 남자가 제일 좋죠."
여기서 잠시 그녀의 장황한 이상형 조건을 논설문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자.
1) 존경할 수 있는 남자
2) 적당한(도대체 그 적당함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제력을 가진 남자
3) 자기 일에 심취하는 남자
4) 다양한 인맥을 가진 남자
5) 일정적인 위치(권력)를 가진 남자
6) 비흡연자
7) 남자다운 패기를 가진 남자
8) 음식 취향이 담백한 남자
9) 언변이 좋은 남자
10) 나 하나만 바라봐 주는 남자
열 손가락 전부를 다 동원해야 비로소 그녀의 이상형 조건에 맞출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뭐랬게?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 그거 씨발 히틀러인데요?"라고 답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열 가지 조건을 온전히 맞출 수 있는 남자는 히틀러밖에 없다.
1번이 다소 걸리기는 하지만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까지 독일 국민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 1위는 무조건 히틀러였다.
개를 지독하게 사랑해 세계 최초의 동물 보호법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채식주의자였으므로 음식 취향이 이보다도 담백할 수 없다.
본업이 화가였으니 예술적 소양은 말할 것도 없고 흡연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뭐 사촌 조카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일종의 카더라 썰도 얼핏 들리지만 공식적으로는 벙커 자살 직전까지 에바 브라운 한 여자만 사랑했으니 전적으로 소개팅녀의 논리에 따르자면 정말 "나 하나만 바라봐 주는 남자" 조건에 완벽히 부합한다.
독일 국민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광기적 말빨은 두말해야 잔소리다.
마지막이 화룡점정인데 히틀러는 그야말로 씹상남자의 패기로 불쌍한 체코와 폴란드를 씹어 먹었을 뿐만 아니라 전 유럽, 아니 전 세계를 전쟁의 포화로 밀어 쳐넣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인지조차 못했겠지만 부지불식간에 히틀러를 열렬히 사랑하는 셈이었다.
반면 나는 처칠 과科다.
천성적으로 게으른 데다 미약한 ADHD, 약간의 우울증, 샤프하기는커녕 퉁퉁한 몸매, 항상 공상에 잠겨 있고 비관적이다.
학업 성적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입에서 담배가 떨어질 시간이 없는 헤비 스모커다.
여자들이 싫어할 만한 최악의 조건은 다 갖춘 셈이다.
어쨌든 본인은 차마 자각조차 못했겠지만 무의식적으로 히틀러를 사랑했던 그녀는 그 술자리가 파하자 돈 한 푼조차 안 내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게 그녀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