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대학병원에서 근무했을 때다.
내 사수는 일베였는데 그는 대뜸 첫 만남에 내 정치색을 물었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가 도리어 나를 회색주의자라며 "도덕적 위기 때 중립에 서는 자들을 혐오한다"는 단테의 말을 지껄였다.
걔가 단테의 <신곡>이나 제대로 읽어 봤을까? 그냥 어디서 하나 들은 것 주워듣고는 지껄이는 치였다. 정치 철학은커녕 일말의 교양이나 지성도 없었다. 수박 겉 핥기로 지적 허세나 부리던 인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말단 직원이었으므로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가 병신 새끼 건 말건, 앞에서 광대처럼 알랑방귀나 뀌어야 했던 것이다. 헛웃음이 나오는 것이 단지 돈 때문이었다. 없는 자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대철학자 버틀란트 러셀은 "누군가 내게 신념을 위해 죽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내가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 희대의 천재도 결코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어떤 주의 주장을 그저 무조건 덮어 놓고 맹신하며 믿는다는 말인가?
역사를 살펴보면 참 재밌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상이 등장한 근본적 이유는 세상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함이다.
공자든 예수든 붓다든 맑스든 말이다. 한 마디로 그 어떤 위대한 사상마저도 사실은 본질이 한낱 인간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간을 위해 등장한 도구가 도리어 인간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공자의 이름으로,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어 무수하게 죽임당한 억울한 영혼들이 그 증거다.
이에 통찰력 있는 현명한 지도자들은 아주 지능적으로 사상을 활용한다. 등소평과 헨리 키신저가 대표적인 예다. 그들의 최대 목표는 무조건 국익이었다. 사상 따위는 그저 한낱 방법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민만 잘 먹고 살게 하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을 외쳤고 키신저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 충격적이게도 공산주의 중국과 손을 잡았다.
더불어 키신저는 더욱 극단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철저히 국익을 위해 미국의 앞마당 남미를 개판 오 분 전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남미 민중의 입장에서는 철저한 개새끼로, 미국의 입장에선 애국자인 것이다.
오죽하면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키신저를 전범 재판에 끌고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 역시 키신저나 등소평과 같은 생각이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사상이라도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철저한 실리주의에 가깝다. 그러려면 어디에 귀속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사람들이 금고를 안전하다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금고로 불리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상도 마찬가지다. 파인만의 어록을 내 식대로 변주하면 "사람들이 사상을 완벽하다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사상이라 불리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하다못해 정말 극단적인 예시로 그것이 일베든, 여시든, 메갈리아든,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최종적으로 종교든 목표를 위해서라면 도구로라도 써야 한다.
그 어떤 최악의 도구라도 필요만 하다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떤 주의 주장을 무조건 맹신하며 완전히 매몰된 사람들만큼 위험한 부류가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