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

by 다람

사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나쁘지 않다고 했으나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공자와는 많이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자는 불세출의 인류 최고의 천재이자 성인이었고 나는 그저 우둔한 범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를 깨닫는 즐거움과는 몇 만 광년 떨어진 저열한 심상이다.


일획일점의 거짓 없이 당장 내일 침소에서 평안히 잠 들어 죽는다 해도 차오르는 슬픔이나 그다지 미련이 없다. 달콤한 삶을 누려본 경험이 없기에 세속적 욕망이 별로 없다. 불운한 생의 대부분이 그래왔듯 사회 질서에서 조금은 비껴난 아웃사이더다.


고기도 씹어 본 놈이 고기 맛을 제대로 알듯 척박한 삶 때문에 행복의 맛조차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내게 있어 행복은 전적으로 영원한 미지의 영역인 셈이다. 때문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승의 행복에 꽤나 무감각하고 무딘 편이다. 이는 본의 아니게 비극을 통한 오랜 훈련으로 다져졌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종교를 믿기로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여전히 내세를 믿을 자신이 없다. 불가지론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 알량한 판단으로는 죽음은 영원한 수면이라 생각한다. 개인적 경험상 자는 동안 그 어떤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이따금 종종 꿈을 꾸기도 하지만 꿈의 기억을 어느 정도 복기해 보면 대부분 평안하다.


부에 대한 강렬한 욕망, 공명심, 허영, 슬픔, 블루지한 한, 어쩌면 성욕마저 아득히 초월한 상태다. 꿈에서의 나는 장주지몽처럼 이젠 내가 나인지조차 자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죽음을 생각하노라면 한편으로 역설적인 안도감이 놓이기도 한다.


오로지 뇌가 인간 사고의 전부라 판단하는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뇌사 상태는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진 상태다. 최첨단 현대 과학은 종교 최전선의 상징인 영혼마저도 철저히 부정한다.


현대 과학의 맹신자인 나로서는 얄궂게도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유사 이래 종교가 그토록 설파했던 사후 세계에 대해 여전히 회의를 품는다.


사후세계가 없다면 이승의 삶은 철저히 헛된 것일 게다. 죽어라 치열하게 일하고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온갖 노력들이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진취적이며 열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다가도 문득 사후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탈진하듯 힘이 빠져 버린다. “어떻게든 살아 남기 위해 아둥바둥대는 이 노력이, 헛짓거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은 것이다.


혹자의 추측처럼 혹여나 그 알량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자살 예찬을 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다만 문득 이를 떠올리면 엄청난 우울감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의지와 열정이 마치 찬물을 끼얹은듯 한없는 무기력에 침잠해 버린다.


나는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정반대의 상상을 해보기로 생각했다. 지금 여기 내가 살아 숨쉬는 이곳이 삶의 마지막 종착지라면 죽음은 완벽한 끝이자 무의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몸과 정신이 바스라지라 최선을 다 해보고 죽는 것이 어떨까란 역설적 도전이다.


어느 일본 만화의 명대사처럼 이곳이 끝이기에 삶을 완전히 하얗게 불태우고 죽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까란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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