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과 악바리

by 다람


한국 마라톤 계의 거목은 단연 황영조 선수와 이봉주 선수다. 까마득한 대선배 손기정 옹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당시 그의 국적은 일본 제국령 조선이었기에 한국 마라톤계라기보다는 민족 마라토너가 더 적확할 법하다.


실제로 올림픽 위원회는 현재까지도 메달 수상 당시 손기정 옹의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분노한 대한민국이 발 벗고 나서서 항의해 봤으나 요지부동이다.


서양인들 특성상 잔인할 정도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원칙'에 충실하기에 빗발친 요구에도 별다른 방도가 없다.


황영조 선수는 천재형으로, 이봉주 선수는 노력형으로 분류되곤 한다.


평생 죽어라 노력한 황 선수가 들으면 불쾌할 수도 있을지언정 그는 신체 조건이 타고난 천재라 다소 유리했을 수도 있다.


반면 이봉주 선수는 불리하기 짝이 없는 조건들로만 가득하다. 마라토너로서 치명적인 짝발부터 엘리트 운동 훈련을 아주 뒤늦게서야 배웠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인 이상 언더독 심리가 있는 탓에 아무래도 이봉주 선수에 조금 더 정이 가는 건 사실이다.


천재와 노력형의 차이 탓이었을까? 스타일도 정반대다.


황영조 선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통해 국민 영웅으로 거듭났고 덕분에 온갖 예능을 종횡무진하며 여러 연예인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미모의 여성 연예인과 열애설도 났으며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심지어 깜짝 가수 데뷔도 했었다. 게다가 음주 운전 전력이라는 개인적 흑역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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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감히 경시할 수 없는 이유는 단연코 천재여서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만사 탁월한 능력이 모든 시시비비, 단점들을 덮기 마련이다.


'천재' 황영조 선수의 근황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오래전 은퇴해 이제는 감독이 된 그가 유튜브에 출연해 러너들을 향해 일침을 날린다. "비싼 신발 고르고 보법이니 보폭 운운하며 따질 시간에 그냥 뛰라는 것"이다. "올림픽 휩쓰는 케냐 애들이 무슨 그런 거 알고 뛰냐"고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닥치고 뛰기나 하라"며 다소 과격하게 일갈한다.


유행에 미친 나라, 운동마저도 철저히 유행으로 소비하며 집단으로 모여 함께 해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성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의 마라톤 지론이 강력한 권위를 발휘하는 까닭은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 때문이다.


댓글에 스포츠 과학을 무시하는 태도 같아서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는 반면, 어찌 우리가 감히 그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황영조 선수가 그것을 몰랐을까? 몰랐을 리가 없다.


태릉 선수촌이 무슨 삼청교육대도 아니고 인간을 개처럼 무식하게 굴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식단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영양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의사부터 운동생리학자까지 포진해 있다. 소비에트처럼 국가적으로 엘리트 체육인을 양성하는 이 나라에서 과학이 없을 수가 없다. 정작 장본인인 황 선수도 분명 과학적 훈련을 경험했을 테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내가 어찌 그의 본의를 알겠냐만은 그저 알량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황 선수 입장에서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그다지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0.01초에 성패가 갈리는 엘리트 선수들에게는 스포츠 과학이 필수지만 나 같은 운동 천치들은 그냥 적당히 즐기면서 뛰는 편이 낫다. 무슨 되도 않게 운동 이론을 들먹이는 게 그로서는 코미디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본질보다 외적인 것에 더 투자하는 성향이 있다. 당장 야트막한 동네 뒷산만 올라가도 히말라야 등반하는 세르파보다 더 훌륭한 기능성 장비를 착용한다. 갖춘 장비에 따라 은근하게 계급이 나뉘는 웃기는 촌극마저 벌어진다. 운동의 본질보다 장비빨에 치중하는 작태, 실전보다 이론에 국한된 국민성을 지적한 게 아닐까하는.


극한의 엘리트 스포츠계 산전수전 다 겪은 황 선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아주 단순하다. "그냥 따지지 말고 하라!"는 것이다.


운동 천치인 내가 감히 뭘 안다고 지껄이겠냐만은 심증적으로 나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내 또래의 MZ 세대들은 머리로 생각하지만 윗 세대들은 철저히 몸으로 사유했다. 일단 달려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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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베이비붐은 한국 전쟁 종전 이후에 일어났는데 과연 그 시절 어른들이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번식과 출산을 했을까?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보다 차라리 평화가 낫다는 단순한 심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 세대들이 온전히 몸으로 근대화를 이룩했다. 뇌가 아니라 몸으로 말한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이역만리 베트남으로 파병을 가고 독일 탄광 광부로, 사우디 사막 공사 현장에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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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계의 전설 김득구 선수는 맨시니와의 경기를 앞두고 "경기에서 지면 관으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는 애석하게도 싸늘한 주검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진짜 죽을 각오로 임한 것이다.


장정구, 홍수환, 그 외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전설들이 오로지 악과 깡으로 덤볐다. 가진 건 오로지 불알 두 쪽, 맨몸뿐이니 니가 죽나 내가 죽냐는 정신력으로 끝까지 버텼다.


내 세대가 누리는 이 나라의 풍요와 번영은 온전히 선배 세대들의 악바리 정신에 기반한다.


뇌가 아닌 몸으로 증거하고 역사한 인물들이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기도 하다. 석박사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학력 인플레가 만연해 대부분이 고학력자인 이 나라 젊은이들이 패기를 잃은 건 외려 너무 똑똑해서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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