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Psychotherapy For?
심리치료는 일종의 도구이므로 다른 모든 도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약점을 극복하고 자연이 원래 부여한 것 이상으로 우리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심리치료는 손바닥 안에 물을 담아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동이를, 무딘 치아를 보완하려고 칼을 만든 것과 형이상학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심리치료의 특징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심리치료는 우리 감정이 작용하는 방식을 개선하려고 만든 발명품이다. 즉, 심리치료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신뢰하고,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잠재력을 존중하고, 적당히 고요하고 자신감 있고 진실하고 직접적이며 수치스럽지 않다고 느낌으로써 우리가 직면하는 상당한 어려움을 바로잡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발명품이면서 심리치료에는 명백히 혁신적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 년 동안 일주일에 두 번 정도 50분간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는 아늑한 방과 의자 두 개, 그리고 중산층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에서 코스 식사 세 개를 혼자 먹을 수 있는 금액에 상당하는 상담 비용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심리치료사의 입장에서 보면 일정 기간 정신의 작용에 관한 광범위한 교육을 받아야 하며, 더욱 책임 있는 권한을
위해서는 비행기 조종사가 면허를 취득할 때 필요한 정도의 엄격함과 지적인 야망, 일정 기간의 실무 경험이 필요하다.
심리치료가 약속을 이행하려면 적어도 8가지의 명백한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 존재의 대부분은 이 세계에 비밀로 남아 있다. 우리 존재의 상당 부분이 우리가 웬만하면 지키면서 살고 싶은 품위와 제정신의 법칙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재료가 우리 마음 밖으로 새어 나오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내면의 많은 것들이 미친 짓으로 보일 수 있다. 어린이 책을 읽다가 (아기 참새와 친구가 되는 코끼리 이야기)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이한 충동에 휩싸이거나, 시간 여행의 힘이 생겨서 청소년기에 놓치고 만 기회를 되찾고 싶은 적이 얼마나 많은가. 냉정하게 보면 이런 순간은 참 한심하고 딱하다. 우리는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일을 걱정하고, 친한 사람을 질투하고, 머리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시름이 깊다. 직장 동료와 가족 구성원에 대해 품는 환상이나, 적에게 이상적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계획은 상당수가 놀랍고 또 불법에 가까운 일들이다.
고립에 대응하려면 친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한 조각 광기에 사로잡혀 실제 친구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게 우정에 대한 암묵적인 계약임을 알고 있다. 연인은 또 다른 해결책일 수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우리라는 존재 가운데서 보통 이상을 파고 들어가 인정해주는 게 파트너가 할 일은 아니다.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과 마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 사이에 크고 안전한 격차를 확보해야 한다.
그 예외가 바로 심리치료다. 놀랍게도 심리치료를 받을 때는 원하는 것을 실컷 말할 수 있고 그러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치료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우리가 제정신임을 확인받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냥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면 된다. 우리가 비뚤어졌고, 이상하고, 겁을 먹었다는 생각을 멈출 필요도 없다. 우리의 가장 어두운 면들에 대해 조심스레 암시를 줘도 대화 상대가 겁을 먹거나 불쾌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오히려 대화 상대는 거꾸로 차분하게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우리는 괴물이나 괴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드디어 외로움의 반대편에 도착한 것이다.
치료사들은 인간 본성의 훼손되지 않은 진실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은 근친상간, 강간, 자살, 우울증과 같은 커다란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그보다 작은 고통과 역설의 경험에 대해서도 잘 안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한 번 스쳐 지나간 사람이 20년 묵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경험에 대해, 다른 곳에서는 점잖은 사람이 문을 부술 수 있다는 경험에 대해, 또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는 사람이 갑자기 운신을 못하게 된 경험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모든 성인의 내면에 혼란스럽고 화가 나고 상처를 입었으며 자신의 말과 현실을 인정받기 갈망하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 어린아이가 다시금 스스로를 알아가야 하고, 어쩌면 눈물과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말을 누군가 들어주기를 원한다는 사실도 안다. 아마 이 어린아이는 상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어른의 자기 명령과 표면적인 성숙함과 상충될지도 모른다.
치료사들은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 도덕적 판단으로 검열당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에 충분히 순응해왔다. 이는 책을 통해서 배운 게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알고자 하는 용기로 이룬 결과다. 치료사는 우리의 환상을 정확히 공유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환상 역시 마찬가지로 다채롭고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와 똑같은 근심을 품고 있지 않아도 우리 모두를 인질로 붙들고 있는 강력하고 특별한 두려움에 대해 충분히 잘 안다.
그들은 정상이란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폭넓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정상이란 우리가 정상인 척 고집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취약한 자아의식이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좋은 사람이나 전형적인 모습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유일하게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지 말고 우리 내면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일부라도 인정하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매우 만족스럽게도 우리 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별다른 악의가 없어도 우리 편이 아니다. 그들은 간간이 질투하고 지루해하고 앙심을 품기도 하고, 어떤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혹은 자신의 삶 때문에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린다. 그러나 치료사는 우리 사건에 집중적이고도 관대한 관심을 쏟는다. 그들의 상담실은 안전하고 일상의 압박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고통을 유감스러워한다. 그들은 우리의 걱정과 분노, 흥분을 이해한다. 우리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님을, 일부러 그랬다 해도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직업상 기계적으로 맞장구치지 않고 우리 경험 속으로 들어가 진정 같은 편이 되려고 노력한다. 수치심과 고립의 유산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동시에 그들의 친절 덕분에 우리 친절은 덜 필요해진다. 정상적인 삶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고려해야 하고 대화 상대의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봐야 하며, 그들의 관심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상담실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어린아이에게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부모처럼 치료사도 자발적으로 관계의 평등을 포기한다. 그들은 자신의 후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일화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 상황을 이해하길 바랄 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선입견을 품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미 견뎌온 고통과 복잡성을 상당히 공감하고 미래의 우리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친절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가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을 알면 평소 피해왔던 경험에 맞설 용기가 생긴다. 충분히 차분하고 안전하며 흥미로운 환경에서 우리는 다른 때에는 해결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취약한 지점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혹은 충분히 오래 화를 내왔다고, 이제 합리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혹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감히 용기를 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친절은 영악하고 당혹스러우며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건설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안정감을 준다.
일정 시간에 깊고 일관성 있게 생각하는 게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 마음이 지닌 구조적 결함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자꾸만 실마리를 잃어버린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생각들이 마구 경쟁하면서 정신의 지평을 벗어나 잠재적인 통찰력마저 흩뜨려 놓는 습관이 있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잠깐 동안 의식이 하얗게 빌 때가 있다. 그럴 때 혼자 있으면 곧바로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의심하고, 뉴스나 확인하고 비스킷을 검색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결국 우리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직장에서 다음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 편지에 가장 그럴듯한 답장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애무를 시도한 후 파트너가 우리 손을 물리쳤을 때 어떤 점이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가와 같이 우리가 열심히 탐색해봐야 하는 주제들이 정신의 모래 구덩이 속으로, 심각한 심리적 타격으로 무너지고 만다.
우리 마음을 알고자 하는 노력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놀랍게도 다른 사람의 마음이다. 고독한 선각자가 풍기는 매력이 있지만 흔히 생각은 함께할 때 가장 잘 떠오른다. 우리 마음의 복잡성에 호기심을 품어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타인의 호기심이다. 내면에 뒤죽박죽 섞여 있는 인상을 단단하게 굳혀주는 것은 밖에서 가벼운 압력을 받았을 때다. 우리의 친밀감을 말로 표현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우리는 무기력했던 집중력을 동원한다.
때로는 친구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조용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듣기의 최고의 가능성은 방해받지 않는다는 공손한 사실을 훨씬 뛰어넘는다. 누군가 정말로 내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적극적인 경청’이라는 전략의 수용자가 된다는 의미다.
치료사는 처음부터 매우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말들을 연속적으로 던져주어 우리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자꾸 곁을 맴돌기만 하는 요점을 찾아내고 고수할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이는 급할 것도 없고 누군가 옆에서 우리가 하는 말을 전부 들어주고 있다는 뜻이다. 치료사는 전략적으로 임무 수행에 반드시 필요하면서 동시에 무척이나 다정한 ‘더 말해보세요.’나 ‘계속해보세요.’ 같은 말을 간간이 쓸 것이다. 치료사들은 나직하면서도 긍정적인 어조로 말할 수 있는 전문가로, 너그럽고 미묘한 ‘아, 그렇군요.’와 유력한 ‘흠, 그래요.’는 우리가 입 밖으로 내기 시작한 말이 아무리 특이한 이야기라도 계속해서 믿음을 잃지 않게 해주는 심리치료의 청각적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소리다.
적극적인 경청의 수혜자로서 우리의 생각과 기억, 관심사는 굳이 깔끔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 뒤죽박죽 흐트러지고 혼란스러워도 괜찮다. 그러나 적극적인 경청을 하는 치료사는 자꾸만 나타나는 혼란을 참고 정원을 가꾼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빨리 덮어버린 땅으로 우리를 데려가 능수능란하게 외면해온 당면 문제를 해결하라고 부드럽게 재촉한다. 마음을 뒤흔드는 불안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면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입 밖에 내는 말들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안심시킬 것이다. 그동안 그들은 우리의 표정과 어조에 나타나는 경미한 변화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표현한 것뿐만 아니라 표현했을지도 모르는 방식에까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보잘것없는 존재나 이상하게 비효율적인 의사소통 상대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종합해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생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심리치료는 한두 차례의 자족적인 시간으로는 핵심 경험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이루어진다. 우리는 시간 속을 살아가고 시간 속에서 자신을 해석해야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접근, 이용할 수 있는 만능 분위기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주는 다른 사람보다 더 기꺼이 특정 기억을 파고들거나 특별한 시각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치료사는 우리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부스러기 더미에서 골라낸 파편을 가지고 천천히 고대의 꽃병을 완성하는 것처럼 우리의 심리적인 자화상을 완성할 수 있게 충분한 실마리를 밖으로 내뱉게 한다. 우리는 계속 치료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충분한 단서를 모으면 그 자화상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 내면의 복도를 헤매 다닌다.
치료사의 적극적 경청은 정처 없는 발걸음이 아니다. 경청의 토대는 과거의 숨은 실행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누구나 질문을 안고 심리치료를 받으러 간다. 우리는 고통의 기원을 은근히 암시하지만 완전히 파악되지는 않는 현재의 문제를 안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왜 자꾸 우리를 통제하고 굴욕 시키려는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속아 넘어가는 걸까?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확신하면서 어떻게 더 만족스러운 대체물을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사람들 앞에 서면 왜 불안과 걱정으로 온몸이 마비되고 말까? 성적인 가능성을 왜 자꾸 방해할까?
질문과 관심, 세심한 탐사와 은밀한 조사를 통해 치료사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우리가 현재 안은 문제가 나머지 문제, 특히 어린 시절 혼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수차례 상담을 통해 잇따라 작은 발견들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감정적 상처의 근원이 밝혀지고 오늘날 우리 성격은 그 상처의 근원에 대한 반응이고 현재의 가능성을 방해하는 식으로 천천히 진화해왔다는 큰 그림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직장생활의 어려움에서 일찍 물러나게 된 것은 부모와의 경쟁심 때문이고 그들의 사랑에 매달리기 위해서임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처음으로 자기 태만의 논리를 고수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의 성격과 우정을 방해하는 공격적 냉소주의가 우리 약점을 확실히 억제할 수 없을 때 우리를 저버린 부모 때문에 생겨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일찍부터 세상이 희망을 조롱하게 놔두기보다 오히려 매 중요한 순간마다 스스로를 실망시키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살을 발라내 골자 상태로 전달되는 해석은 어처구니없는 결말에 도달할 것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으며 곧 저항이나 공격에 부딪칠 것이다. 해석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석이 언급하는 감정을 내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어른이 된 자아 안에 통렬하게 민감한 한때의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말고 직접 느껴야 한다.
그 과정이 효과를 거두려면 치료사는 전략적으로 우리가 서두르지 않고 전적으로 문제의 구조를 발견하고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치료사와 우리 사이에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이어질 수 있는 지속적인 접촉, 즉 주간 상담은 전문적인 맥락에서 보면 확실히 이상하게 들리는 어떤 것, 즉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가 처음 심리치료를 받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관계에 감지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이해는 되지 않는 어떤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지만, 곧 진실성이 결여되고 내적으로 둔감하다고 느끼고 뒤로 물러났을 수도 있다. 어쩌면 몹시 강렬한 사랑에 빠졌다가 늘 관계를 끝내고 다시 순환을 시작하게 하는 커다란 단점을 파트너에게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치료사와의 관계는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조합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치료사와 함께 쇼핑을 하거나 침대에 나란히 누워 TV를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종종 나타나는 경향들을 치료사와의 관계에서도 불가피하게 그리고 매우 편리하게 마주친다. 치료사에게서도 우리는 매력을 느꼈다가 냉담해지고, 이상적인 모습에 반했다가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치료사와 함께 있다면 이 경향성은 목격될 수 있고, 속도가 느려지거나, 논의되거나, 공감을 받으며 탐구되거나, 해로운 상황으로 번지지 않게 극복될 기회가 생긴다. 치료사와의 관계는 한 사람의 행동을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리트머스지가 되고 덕분에 우리는 더 큰 자기인식에 근거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수정하고 개선할 수 있게 된다. 심리치료실에서 우리의 성향과 습관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야 할 성격의 중요 정보로서 주목받고 언급될 수 있다. 치료사는 친절하게 우리가 공격받은 사람처럼 반응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 우리가 재정 상태에 대한 인상적인 이야기를 몹시 들려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그래도 여전히 그들은 우리를 좋아한다) 혹은 그들조차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생각을 그저 한 번 시도해보려고 하는데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동의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우리 주목을 끌고 싶을 때만 그들은 질문을 한다. 그들은 실제로 가지지 않은 태도나 관점에 대해 우리가 쉽게 선입견을 가질 때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실망했을 거라는 생각에 혹은 그들이 우리를 지루해한다는 생각에, 혹은 그들의 성적인 면에 반감을 품고 있다는 생각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빠져드는지 지적할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사람들을 과거에서 온 게 틀림없는 역할에 캐스팅하는 습관을 보일 때 그들은 은밀하게 지적하고 함께 이런 버릇의 기원을 찾을 것이다. 이런 버릇은 우리가 영향력 있는 보호자를 향해 느끼는 감정을 모방하기 쉽고 모든 사람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형성한다.
심리치료 시 맺는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의 축소판 역할을 하므로 우리가 감지하기 어려운 감정적 경향을 알아내는 독특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불평하지 않을 사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을 사람, 보통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않고 공감해줄 사람과 관계의 문제점들을 경험해보면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이해할 수 있고 관계를 맺는 새로운 양식을 시도해볼 기회가 생길 수 있다.
치료사와의 관계는 어린 시절부터 늘 우리 내면에 깃들어 현재의 우리를 심각하게 방해할 수 있는 전략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본보기가 되어준다.
심리치료의 관계는 어쩌면 우리가 처음으로 맺는 적절하게 건강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선입견을 강제하지 않고 우리의 본모습에 대해 지나치게 부끄러움이나 당혹감을 느끼지 않고도 복잡한 우리의 현실을 큰 그림으로 보여줄 만큼 상대방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이 관계는 매우 특별한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본보기가 되어주고 우리는 친구나 파트너와 함께 하는 단조롭지만 중요한 일상생활에 이 본보기를 적용하기 시작한다.
우리 마음 어딘가에 매일 해임되는 판사가 한 명 앉아 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우리의 수행 정도를 살펴보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며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추적해 마침내 평결을 내린다. 내면에 도사린 판사의 목소리는 간단히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때 우리 밖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내재화된 것이다. 우리는 형성기 동안 들어온 경멸과 무관심, 혹은 자비와 온기의 말을 흡수한다. 그 목소리는 때로는 긍정적이고 다정하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는 전혀 다정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패배주의적이고 징벌적이며 공황에 빠져 있거나 굴욕적이다. 내면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지닌 최고의 통찰력이나 성숙한 능력 같은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심리치료는 우리 스스로를 판단하는 방식, 그리고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치료사가 몇 달 동안 우리에게 말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방식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도전에 직면하면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우리가 겪는 까다로운 문제에 관해 치료사가 전해주는 건설적이고 친절한 목소리를 충분히 자주 듣고 나면 점점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느껴질 것이고 결국에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 될 것이다.
심리치료는 지금껏 접해왔던 대부분의 목소리보다 더 나은 소리를 내면화해 필요할 때 들을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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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이후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분명 여전히, 그리고 꽤 자주 불행할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우리를 오해할 것이고 우리는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며, 가지고 싶은 좋은 것들은 여전히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성공은 받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만 갈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좋은 부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경쟁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판단에 굴복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가끔은 외로울 것이고, 심리치료를 받았다고 해서 병에 걸려 죽어가고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까지 막을 수는 없다. 심리치료가 삶을 실제보다 더 낫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확실한 경고에도 심리치료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사소하지만 매우 실질적인 이점이 존재한다.
유아기의 상처에 대비해 우리가 쌓아온 방어막은 경직되어 있어서 우리가 기동 할 공간을 제한하는 게 주요 특징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주 독특하지만 불행한 유형의 사랑에 빠지기 쉽다. 또는 특정 장소에 가면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혹은 끊임없이 냉소적이거나 고집스러울 정도로 명랑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되어도 좋은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우리 감각은 과거에 받은 충격의 포로로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최초의 도전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 논리를 더욱 깊이 이해할수록 한때 벗어나고 싶어 했던 모습에서 탈출할 모험을 시도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정상에 오르거나 홀로 시간을 보내거나 새로운 직업을 구하고자 희망하는 여유가 생길 수 있다.
타고난 성격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지배적인 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웅크린 자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고 결국 충분히 안전한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부끄러워하고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치료사가 친절하게 관심을 보여준 결과 우리 자신에게 역겨움을 덜 느끼게 되고 우리 요구를 덜 숨기게 된다. 우리의 깊숙한 공포와 소망을 한번 표출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 앞에 꺼내기도 조금 더 쉬워질 수 있다. 침묵에도 대안이 있다.
우리는 존재할 권리를 크게 깨닫고 나서 비로소 우리로 사는 게 어떤 느낌인지 더욱 잘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비판에 분개하고 마는 게 아니라 그들의 비판이 왜 부당한지 설명할 수 있다. 파트너에게 화가 난다고 해서 그들을 사악하다고 비난하고 집을 떠날 필요가 없다. 무조건 탈출하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이상할 정도로) 예민한지, 그들의 애정을 확신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안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게 우리 잘못이 아닌 척 애쓸 필요 없이 우리의 (불행한) 한계를 솔직하게 설명하고 더 나은 발전을 향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게 재앙으로 느껴질 필요는 없다.
치료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과거 어떤 사람들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 깨닫게 된다. 비난은 자연스러운 반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우리 자신의 결점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를 기반으로 해서 타인의 해악적인 행동도 그들 자신의 혼란과 동요의 결과로 해석하는 게 성숙한 반응일 것이다. 우리에게 원초적인 상처를 가한 사람들은 거의 한결 같이 일부러 의도를 가지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상처를 받았고 상처를 견디려고 애썼다. 슬픔과 걱정이 맹목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세계는 슬프지만 온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통찰력은 오직 경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통찰력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두려워할 게 적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가한 사람들은 우리의 특별한 약점을 알고 일부러 그곳을 겨냥한 우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 자신도 상처 입은 존재로 몸부림쳤고 모든 삶이 안고 있는 개인적인 슬픔에 대처하고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심리치료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해냈다.
번역: 이주혜
편집: 인생학교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