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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학교 서울 Dec 19. 2018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하면..

Why You Should Never Say: ‘Beauty Lies i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


어떤 건축물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에 관해 심각하게 의견이 맞지 않을 때,

혹은 어떤 예술품에 관해 의견이 맞지 않을 때,

누군가 재빨리 이렇게 말하고 논쟁을 끝내버릴 때가 있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 말은 침묵을 끌어오는 힘이 있다. 일단 이 말이 언급되면, 어떠한 시각적인 것의 장점이나 단점에 대해 계속 대화를 끌어가고자 노력하는 일은 그저 날카롭거나 반사회적이거나 노골적인 무례로 비칠 수 있다. 


이렇게 상대주의에 굴복하는 경향은 과학 시대의 역설적인 증상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권위 있는 세력인 과학은 언제나 객관적인 진실만을 다룬다. 과학이 판단하는 대상은 명백히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음, 나는 물의 끓는점이나 중력의 본질에 대해 그렇게 느끼지 않아.”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과학이 우리에게 전해준 사실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추함의 개념은 과학적 증거의 체계 바깥에 존재하므로, 흔히 그것들은 완전한 상대주의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즉, 어떤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더 좋은 대답 혹은 더 나쁜 대답에 도달하는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과학의 확실성은 인문학의 합리적인 논쟁마저 불필요하고 쓸모 없는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말은 거의 언제나 부적절하고 매우 곤란한 말이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든 피해야 할 말이다.


우선 누구도 그 말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는 타당한 취향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취향이 동등하다고 믿지는 않는다. 아름다움이 단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면, 썩어가는 배설물과 소변 냄새가 풍기는 쓰레기장이 아름다운 장소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것도 꽤 분별력 있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암스테르담 운하 옆의 이 현대식 주택들이 흉물스럽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상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명백히 표현하지는 않아도 우리는 저마다 미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칙에 따라 우리 취향이 타인의 취향과 상충하는 순간을 매우 분명하게 인식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미학을 둘러싼 지적인 불일치에 여유 공간이 존재해야 하고, 어떤 스타일이나 접근법이 다른 방식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갈등에 대한 예민한 민감성과 타인을 향한 무례나 인색함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표현에만 의지한다면 사실 낯선 사람을 더욱 화나게 하고 더 무모한 상황만 만들어낼 뿐이다. 결국 우리는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거나 더 추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주제 전체가 본질적으로 하찮다고 암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경제나 사회정의에 관한 진실에 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주제에는 중요한 일들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주제에 접근하는 바르거나 그릇된 방법에 대해 각자 입장을 취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을 통해 논쟁하고 방어할 준비를 갖춘다. 우리는 ‘빈곤계층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주제이다.’라거나 ‘가장 좋은 양육법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혹은 ‘환경의 미래는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다.’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공격적이고 무모한 논쟁의 위험성은 인정하지만, 까다롭지만 중요한 논쟁을 합리적이고 예의 바르게 진행시킬 방법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논쟁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가 미학에 관한 논쟁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부분적인 이유는 자신의 취향에 대해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학에 관해 행동하는 방식과 음식과 음악에 대해 행동하는 방식을 비교해보자. 음식과 음악은 모두 저마다 강력한 의견을 갖고 있고 자신의 경우를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논쟁을 즐길 수 있는 분야이다. 우리는 여행관련 웹사이트에 새로 생긴 남아시아 레스토랑을 평가할 때, ‘좋은 레스토랑은 그저 먹는 사람의 위장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저마다 나름의 관점을 가진다. A 장소가 왜 좋은지, B 장소는 향신료 사용 측면에서 어떻게 부족한지 지적하기를 원한다. 흥미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고집한다. 비슷한 예로 음악에 관해서도 듣는 사람의 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차르트가 ‘버스 바퀴가 돌고 도네’라는 동요보다 우월하다고, 혹은 런던 그래머(London Grammar, 영국의 인디밴드)가 버브(the Verve, 영국의 록 밴드)보다 낫다고 확신을 가지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음악가가 다른 음악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토론의 타당성과 흥미로움, 그리고 건축과 예술과 관련한 토론 자체를 거부하는 이상한 현상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미학에 관한 중립적인 입장은 진정한 상대주의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취향에 대해 자신 없는 증상에 더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아름다움에 대한 논쟁을 그만두라고 요구하는 것은 얼핏 친절하고 관대한 조치로 보일 수 있겠지만, 어떤 물건이 아름다운지 혹은 흉물스러운지 판단하는 능력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사업을 운영하기가 극도로 편해질 뿐이다. 현금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좋아 보이는 것을 만들려는 노력에 들어갈 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니까. 아무도 좋아 보이는 게 뭔지 모르는 사회니까!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표현은 원래 속물근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로 부각되었다. 


고압적인 전문가들이 문화의 고삐를 장악하고 엄격하고도 경멸적인 권위로 취향을 형성하려고 할 때 보통 사람들도 자신의 열정을 좇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말이었다. 강압적인 전문가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좋아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반대의견은 경멸했다. 이때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말은 그들의 편협함을 향한 방어책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나를 굴복시키려고 하지 마. 내 선호는 개인적이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어.”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느낄 자유가 충분히 지켜지는 이때 굳이 초기의 자유주의적 방침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문제는 문화적인 속물들에게 좌지우지 당한다는 게 아니라, 매혹적인 예술품과 건축물이 유지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문화가 재빠른 수익성에 사로잡혀 있고 건축가와 예술가가 하는 일에 대한 논쟁이 거부당하는 현실이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말로 대화를 끝낸다면 이미 힘든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해 합리적이고 공개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상세하게 말할 수 없는 사회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추악함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번역: 이주혜

편집: 인생학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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