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Family Matters
감정적 혈연주의
가족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족이 뻔뻔한 혈연주의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혈연주의를 몹시 부정적으로 생각해왔다. 좋은 사회는 사람들이 각자의 장점 혹은 단점에 따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곳이지 가족으로부터 어떠한 부당한 호의도 받아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적어도 감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는 대다수가 실제로는 이런 원칙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감정적인 혈연주의자다.
역사상 유럽에서 혈연주의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 가톨릭교회와 관련이 있었다. 혈연주의(네포티즘, nepotism)라는 말은 일련의 교황들이 다른 가족 구성원과 함께 자신의 조카(이탈리아어로 니포테(nipote))를 재능과 상관없이 최고의 자리에 임명하면서부터 생겨났다.
1534년 이미 나이가 지긋했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교황으로 등극하면서 바오로 3세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린 손자(역시 알레산드로다)를 부와 권력을 모두 거머쥘 수 있는 추기경 자리에 앉힌 것이었다. 또 다른 손자는 당시 교황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던 이탈리아의 작은 나라 중 한곳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부당한 처사였다. 이런 면에서 혈연주의는 일과 경력에 관해서는 공개적이고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는 현대의 계몽주의 사상과 정면 배치된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적인 면이 아닌 감정적인 면에서는 친척을 향한 편향에 매우 든든하고 매력적인 면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가장 강력하고 질긴 혈연주의의 수혜자였다. 혈연주의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지구상에 수백만 명의 다른 아이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장점과 전혀 상관이 없이(실제로 장점이 전혀 없었다) 부모님과 친척들은 어마어마한 시간과 사랑과 돈을 우리의 행복에 쏟아 붓고 우리를 돌보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그럴 만한 자격을 얻을 만큼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 당시 우리는 인사는커녕 숟가락 하나도 제 힘으로 쥘 수 없었다 - 그냥 우리가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혈연주의는 연달아 떼를 쓰며 울어도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불쾌한 성격적 특성도 넘어가줄 거라고, 몇 시간 동안 벌컥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더라도 지지를 받을 거라고, 부모님은 특별히 착하지 않은 아이들도 용서할 거라고, 명절에는 집에 나타나게 한다.
가족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신념이나 성취나 노력과 상관없이(이것들은 모두 달라지거나 실패할 수 있다) 훨씬 더 순수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 즉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에 기초해 집단에 소속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고용이 위기에 처한 세상에서 우리는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해 신속하고 분명하게 판단을 받지만, 저녁 식사 때 아주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 경력 상 실패를 했더라도 최소한 가족 안에서는 해고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대체로 타인의 시선 아래서 우리 입지가 얼마나 약한지를 생각해보면 이는 현재 진행 중인 엄청난 정서적 안도감의 원천이다.
가족 안에서도 종종 환영할 만한 무시가 존재하는데, 단점만이 아니라 장점도 무시당한다. 가족 안에서는 우리가 돈과 일이라는 바깥 세계에서 얼마나 잘하는지 혹은 못하는지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고등법원 판사가 된 딸이 시장의 작은 점포에서 종이접기 용을 파는 아들보다 더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 수천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강철 협상가이자 깐깐한 상사도 점퍼를 고르는 취향이 형편없어서, 혹은 적절치 못한 시간에 자꾸 트림을 해대서 친척들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할 수 있다.
일이라는 분야에서 혈연주의는 정말로 잘못이지만 우리의 감정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혈연주의도 있다. 우리가 특정 분야에서 아무리 유능하고 탁월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약한 지점들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 지점에 대해 우리의 실패와 어리석은 실수를 참아주고 우리에게 두 번째, 세 번째, 아니 네 번째 기회를 주며, 우리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전혀 없어도 늘 우리 편이 되어줄 거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소수라도 급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가족은 우리의 잘못을 못 본 척 눈을 감지는 않지만, 우리 잘못을 이용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하게 우리를 비난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가족을 정의하고 나면 이상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는 가족의 개념을 기본적인 생물학적 한계에 가둘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우리에게 깊은 지지를 보내는 사람은 누구나 넓은 의미의 ‘가족’이 될 수 있다. 또 우리 역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상의 윤리적 목적은 실천적으로는 특별히 요구하는 게 많을지라도 구조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즉, 모든 인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거대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지식
우리 가족 구성원들은 어쩌면 세상에서 우리의 핵심적인 부분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가족과 더 잘 지내지 못할 수도 있다. 가족은 우리의 현재 우정이나 자세한 재정 상태를 잘 모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은 다른 사람들은 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분위기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다.
성인이 되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전체적인 발달 단계에서 비교적 늦게 만나는 셈이 된다. 친구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대강은 알게 되지만 휴가용 캠핑카가 어땠는지 해변의 숙소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그때 주고받았던 농담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냄새가 풍겼는지, 카펫의 질감은 어땠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당시 어떤 감정이 순환했는지 세밀한 결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있으면 지식의 흐름은 반대가 된다. 가족은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고 언제나 이상적으로 현명하거나 지적인 증인이 되지 못할 수 있지만 늘 곁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많이 이해하는 데는 확실히 우세하다. 성인이 되어 인간관계를 맺다보면 서로의 과거를 잘 몰라 복잡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가족끼리는, 혹시 형제나 자매가 저녁식사 중에 시끄럽고 오만하게 군다면 무관심한 엄마를 향해 제발 자기 얘기 좀 들어달라고 시위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즉각 진정시킬 수 있는 완벽한 반응이 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나는 지금 네 말을 듣고 있어.”). 만약 우리가 세 살 때 현재의 깐깐하고 엄격한 재무담당이사와 함께 목욕을 했더라면 우리는 그 사람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혹독한 방식이(너무 당혹스러워 보이는) 사실은 엉망진창 이혼을 거치고 난 가정의 혼란을 피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상을 알면 많은 것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가족이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의 과거는 오히려 현재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새롭게 발전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자유가 충분히 주어지고 깨끗한 새 출발을 흡족할 만큼 여러 번 하게 된 후에는 우리도 가족을 향해 화해와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라면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불완전하지만 최고인 기록보관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낯설지만 안전한
가족이 안겨주는 확실한 공포이자 대단한 이점은 가족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고 만나기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사이좋게 지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점이다.
우정과 직업상 인간관계는 특정 연령대와 소득, 이데올로기 계층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데 이는 매우 효율적이나 동시에 해롭기도 하다. 우리는 미묘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한다. 그러나 가족은 정반대이다. 82세 여성과 4세 소년이 친구가 될 수 있고 56세 치과의사와 11세 여학생이 바닷가에서 헤엄을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물장구를 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가족의 독특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격하게 낯선 상황에 직면해도 충분히 안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시동생 덕분에 우리는 러시아 다이아몬드 시장의 삶을 잠시 만날 수 있다. 가족 모임을 나가면 일본의 나카야마 숲의 탄소 순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대학 연구원이 채무초과 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회계사와 마주 앉아 천천히 점심을 먹을 수 있다. 가족은 뚜렷한 차이점 중에서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정치적 견해가 정반대인 사람과 설거지를 하면서 컵을 제대로 헹구는 법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할 수 있다. 우리보다 83배나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 우리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어 예상치 못한 폭우로부터 소풍을 구할 수 있다. 조카들이 졸라대는 바람에 어린이 대 어른의 물총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장발의 루저이자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고 내심 무시했던 사촌의 도움을 받고 그가 매복할 자리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조금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족은 최선을 다해 세대 간 차별에 맞선다. 우리는 대고모의 정치적인 견해를 듣고 1973년에 널리 퍼졌던 신념에 대해 알게 된다. 주니어 하키 리그에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게 된다. 어린 사촌은 학교 시험으로 고민이 많고 스물한 살이 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시험 삼아 탐색 중이다. 삼촌은 최근 은퇴했고 일 없는 생활을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조부모의 장례식장에서 18개월 조카가 여기저기 기어 다니고 우리는 잠시 기저귀 갈기와 엉망진창 숟가락질의 세계를 만난다.
종종 다른 삶의 단계, 다른 태도, 다른 전망 등 타자는 까다로운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그들과 자신 있는 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어색해 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고 부정확해진다. 가족의 삶이 원활하게 굴러가면 자칫 만화처럼 희화화되고 무서운 모습으로 접했을지도 모르는 다양한 인간의 경험에 지속적으로, 직접적이고 따뜻한 방식으로 노출된다. 이상적으로 대가족은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째, 눈에 띄게 불쾌한 사람도 표면 아래로 들어갈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나 흥미로운 사람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둘째, 좁은 시야의 현재에서는 제대로 마음에 담아두기 어려웠을 삶의 긴 이야기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번역 이주혜
편집 손꼽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