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쓴다.
그렇게 잠시 내 기억 속으로 미뤄 두었던 14개의 글들을 다시 하나씩 만나며, 나의 자리여서 어쩔 수 없다 숨겨두었던 나의 진심, 나의 표정이 무엇이었는지 되찾고픈 욕심이 생겼다.
아니, 사실은 요 며칠 새 특히 그랬다. 아침 이슬을 지은 음악가이며, 학전의 설립자이자 뮤지컬 제작자인 김민기에 관한 다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보고나서부터다. 거기서 김민기는 '학전의 배우들은 앞것이고, 자신과 스태프들은 뒷것'이라고 규정한다. 참 마음에 드는 어휘 선택이다.
나는 30년 가까이 음악을 해온 싱어송라이터다. 최근엔 상황상 무대에 서는 일이 거의 없지만, 나는 늘 앞에만 서는 것도 뒤에만 서는 것도 특별히 선호하지 않는 '어중간'을 선호한다. 그 '어중간'이란 어쩌면 공격기재인 동시에 방어기재다. 사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불편해하거나 부끄러워하고, 어쩌면 앞것들이 감당해야 할 것들이 영광보다 무게로 다가오는 이들의 자기 욕망과 자기 회피의 경계 그 어디 쯤일지도 모른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앞것의 무게, 그 뒤로 숨은 진심의 소중함을 되새겨본다.
1971년에 발매한 1집 앨범, 그리고 한참 세월을 지나 학전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5장의 앨범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어떤 꾸밈도 없는 일상의 복장,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짙은 저음의 덤덤한 말투 그대로를 옮겨놓은 듯 꾸밈없는 듯 조심스러운 대화같다.
갑자기 잠시 멈춰선 나의 음악을 소환한다. 동네 도서관에서 지역주민들을 위해 노래 만드는 일을 돕고 있다. 지나치게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문득 나의 노래가 그리워진다. 나만의 공간과 시간의 날실과 씨실로 정교하게 짜낸 음악이..
2012년 MIDO 라는 이름으로 '여행자'라는 타이틀의 앨범을 만들었다. 우리 가족 이야기다.
사실 그 이후로 다른 누군가를 위한 음악은 많은 궁리와 소소한 실천이 10여 년 간 있었으나, 음악가로서의 내 음악여정은 잠시 멈춰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음악을 이제 해야 할까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냥 그렇게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왔다 나가는 생각들을 둔 채 그렇게 시간이 흘러와서 여기까지다.
최근에 '액체'라는 단어에 꽃혔다.
인생이란 작은 호흡으로 시작해 단단한 집을 세우듯 기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고체로 그렇게 탄생, 성장, 성숙, 소멸해간다.
기체처럼 희미하게 사라져가며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과거다.
액체처럼 무언가에 담아낼 수 없이 부딪히며, 휘돌아가며, 흘러가는 오늘이다.
고체처럼 굳어가는 슬픔과 안정감 속에 거룩한 소멸을 꿈꾸어야 할 내일이다.
인간은 실은 뼈와 살과 같은 고체로 되어 있는 듯하나, 사실 피와 땀과 눈물로 시간과 공간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은 채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는 액체다.
때때로 표정이란 앞것의 삶 속에서는 진심을 숨기기 위해 존재하지만, 뒷것의 삶 속에서는 아무런 기능도 없다. 그 무표정함과 같은 한없는 자유로 나를 탈출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음악이다.
한없이 단단하지만 유연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한, 무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나'라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