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 일정을 다 마치고 난 후 늦게라도 광화문에서 열린 추모 문화제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가 생각났다.
그림형제가 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다.
기억이 까마득하여 이야기를 조금 더 정확히 떠올리기 위해 나는 인터넷을 뒤졌다.
하멜른이라는 도시에 쥐가 너무 많아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었다. 그때 한 피리 부는 사나이가 나타나 돈을 주면 쥐들을 모두 없애주겠다고 한다. 마을의 지도자들은 그리 하리라 약속하고 피리 부는 사나이는 신비로운 연주로 쥐들을 모두 처리한다. 하지만 나중에 마음이 변한 지도자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약속한 돈을 주지 않는다. 화가 난 피리 부는 사나이는 자신의 피리를 이용해 그 마을의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사라진다. 그 마을의 어른들은 큰 슬픔에 잠겼고, 다리가 불편하여 그 아이들을 따라가지 못한 아이 하나만 오직 남아 어른들의 위안거리가 되었다는..
어린 시절의 이 동화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매우 무섭고 슬픈 이야기였다.
이 동화는 묘하게도 요즘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 같다.
들끓는 쥐와 수많은 사회 문제들,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나를 포함한 어른들의 모습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이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은 흔히 나라의 미래 혹은 보호와 돌봄의 대상으로 주목받는다. 하지만 어른들이 취해야 할 이익을 위해 사회적 약자의 역할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면 무섭게도 빨리 등을 돌려버리는 잔인함이 어느덧 무심하게, 무섭게 어른이 된 우리의 가슴에 켜켜이 쌓여간다.
미래라고 말하지만 언제나 아이들의 세계 속에 가둬 그들의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그 아이들에게 언제나 자신들의 세상,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가치와 신념만을 심어주려 한다. 경험과 인생과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가 다음세대를 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너무나 부끄럽지만 나 자신조차 나의 사랑스런 두 딸에게 그런 아빠가 아닐까 가끔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동시에 가진다.
묘하게도 사회의 많은 정책과 법들은 이렇게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때론 사람을 살려내고 때론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피리 부는 사나이는 하멜른 마을에 살고 있던 어른들의 마음속에 살고 있던 두 얼굴, 즉 천사와 악마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다른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일 수 있다.
우리 304명의 아이들은 이 사회에 너무나도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었다. 사랑스런 아이들의 희생은 단순히 정치적 이슈가 아니다.
어른들 중에서 누구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이 시대의 다양하고 깊은 상처와 치부에 대해 너무나도 처절하게 그 민낯을 드려내 보여주고 있다.
얘들아,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친구들아..
부디 돌아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