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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라다 Jun 08. 2021

성장이라는 불편한 과정

알아서 불편한 것들

     


성장과 배움은 원래 불편한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불편한 게 정상이고 표준이라는 점을 아셨으면 합니다. 나 혼자만 불편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귀를 열어놓고 불편에 적응하세요." (중략)

교육에는 뭔가를 전환시키는 힘이 있으며 교육은 원래 불편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중략)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하다면 나는 아무것도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는 겁니다. 여기는 불편한 자리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게 정상적인 배움의 과정입니다."


- 브레네 브라운 "마음 가면' 중에서



나는 원래 순응적인 사람이었다. 그땐 나도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순응적으로 살았구나, 하고 느낀다.

내가 가진 것 안에서 만족을 찾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야 행복해진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범위가 잘못되었다.

나는 내가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순응해왔다.

실수한 일에 대한 부분이 아닌 인격을 비하하는 발언을 들었어도, '애초에 내가 실수하지 않았으면 듣지 않았을 텐데'라며 화살을 내 안으로 돌렸다.

실수한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그 정도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직장인들의  정도 고충이야 흔한 일이라고도 하겠지만, 나도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지만 요즘 나는 그 부분이 너무 불편하다. 내 인식의 한 부분이 깨어서 일 테고 그것이 성장이기에 불편한 것이라면 달게 느껴지기도 하는 불편함이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마음을 내 아이들이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앞이 깜깜하고 막막해진다.

나는 아이들에게 저항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먹고살기 위해 꾹 참는 것을 선택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참지 말고 저항하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에서 아이를 키워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경단녀의 꼬리표를 끊어내고 다시 사회로 나와서 보는 세상은,

그전의 것과 확실히 다른 것 같다.

내가 겪는 고충을 내 아이가 겪는다고 생각하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부당한 것을 조금이라도 고쳐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아니, 그보다 더 이전에 내가 아이에게 그런 힘 있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런 힘 있는 어른이라면 차라리 어른이 안 되는 게 낫다. 힘은 써야 할 데에 써야 한다. 쓰지 말아야 할 곳에 쓰는 힘은 폭력일 뿐이다. 내가 써놓고도 무섭다. 부모라는 자격으로 행했던 수많은 폭력들이 내 머리를 스쳐간다.

당장에 싹 바꾼다고 다짐할 순 없지만 조금씩 고쳐나가리라.

부모가 바뀐다는 것은, 아이가 변한다는 것이고,

아이가 변한다는 것은 곧 세상이 변한다는 뜻이다.


나는 내 아이가 외부의 환경이 어떤 판단과 압박을 가해도 흔들리지 않는 힘을 가진 아이가 되길 바란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아이에게 그렇게 살아내라고 등 떠밀 수는 없다.

지금껏 해왔던 대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은 원래 그렇게 흘러왔다는 핑계로 도망치면서 살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아이가 나를 자라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불편한 마음을 한 움큼 쥐고 한 뼘 더 자랐다.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위해 인생의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고, 어느 순간까지는 아이 몫의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양육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까지가 양육이 아닐까 하고.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겠지만 아마 그만큼 무겁지 않을까 그것 역시 짐작만 해본다.


-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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