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영역의 공적 확장
연간 비가 1000mm 이상 내리면 벼를 농사하기 좋은 환경이며, 그 이하라면 밀을 재배하기 좋은 환경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은 상대적으로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벼농사를, 서쪽은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밀농사를 해왔다.
벼농사는 많은 양의 물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만 밀농사는 적은 사람으로도 농사를 짓는데 문제가 없다.
때문에 벼농사를 하는 지역에서는 집단주의가 강하고 밀농사를 하는 지역은 개인주의가 강하게 나타나며 이 내용은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Thomas Talhelm교수의 한 논문에서 밝혀졌다.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는 상하관계와 집단주의는 필연적 운명이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서열을 매기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의 당연한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모임이나 단체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거나 연차가 낮다면 ‘막내’로 불리게 된다.
막내에게 반말을 하고 사소하고 귀찮은 일들을 모두 도맡아 하게 되며 어딘가에서 실수를 하여 혼나게 된다면 먹이사슬 맨 아래에 있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도 수행하게 된다.
참 고달픈 역할이 아닐 수 없다. 맡게 된 일이 어떠한 일이던, 내 이름이 무엇이던 그 사람은 ‘막내’의 직위를 갖게 된다. 명문화되어있지 않을 뿐 어디에나 ‘막내’라는 직위는 존재한다.
이러한 상하관계 문화는 군사문화에 기반한다. 군대는 상하관계가 반드시 필요한 조직이다. 외부의 적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서 부대원들은 한 몸처럼 동작해야 한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생각을 주장한다면 그 머뭇거리는 순간에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상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방식이 이 조직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93년도까지 ‘교련’이라는 군사 교과목을 배웠다. 교무실에 들어갈 때에는 관등성명을 대고 들어갔으며 하나 된 유니폼을 입고 훈련받았다. 그래서 당시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상하관계에 매우 익숙하며, 그들은 현재 40대 이상이다.
더불어 상하관계를 많이 강조하는 사람들은 주로 40대 이상에서 많이 관찰된다. 막내 직위가 더욱 심화되게 된 것이 바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본래 ‘막내’라는 말은 가족 안에서 쓰이는 말이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나중에 태어난 사람을 말하며, 부모님과 형제자매의 심부름과 잡일을 주로 도맡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가족에서는 서열이 명확히 존재하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하고 동생은 언니 오빠의 말을 들어야 한다. 집안에 분위기에 따라서 그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 모두 그러한 역할과 분위기를 알고 있고 또 행하고 있다.
문제는 업무, 사적인 모임 등 대부분의 사회 활동에서 사적 영역인 ‘막내’를 공적 영역으로 끄집어 온다는 것이다. 그 업무와 모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요소가 전혀 아님에도 노동과 잡일을 전부 떠안긴다.
업무에서는 맡은 직책과 직급이 다를 뿐, 모두 동료임에도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휴식을 위해 떠맡기며, 여기서 동료의 관계는 깨지고 상하관계로 전환된다.
또한 모임에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음에도 누군가는 즐겁지 않거나 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상하관계는 사회생활에서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상하관계는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한다. 서구사회의 의사결정이 효율적인 데에는 수평적인 구조가 한몫한다.
대표나 팀장이나 사원이나 모두 같은 동료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만 적절한 선은 지키며 소통한다. 쉽게 표현하면 “굉장히 예의 있는 친구”처럼 행동한다.
책임자라고 해서 사원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깔보지 않으며, 사원들은 책임자를 친근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깍듯이 하지 않는다. 이처럼 서열이 무너진다 해서 예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영국과 유럽에서 직장을 다니는 여러 현지 친구들을 겪으며 느꼈다.
따라서 ‘막내’는 ‘신입’으로 순화해 칭하는 것이 옳다. 어쨌든 집 밖에서 만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남’이다. 과연 가족 구성원에서 행하는 역할과 행동을 사회로 끄집어 올 필요가 있을까.
또한 ‘가족처럼’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일종의 폭력이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강한 집단주의는 이 사회가 온전히 돌아가기 위한, 더 잘 살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었다.
오늘까지 우리나라는 목표했던 수준 이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제는 국가 전체를 위한 헌신보다 개인의 삶의 질을 요구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막내라는 감투는 이제 마음 구석에 넣어놓고 수평의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