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갈등과 대중문화
기원전 1700년경 수메르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있다. “도대체 왜 학교를 안 가고 빈둥거리고 있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느냐? 너의 선생님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항상 인사를 드려라. 왜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지 않고 밖을 배회하느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거라. 도대체 왜 글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어느 시대에나 젊은이들은 문제가 많다고 여겨져 왔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요즘 이러한 얘기를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어른들이 바라보는 젊은이들은 왜 나약하고, 목표도 없고, 의욕이 없게 비춰질까?
첫 번째로, 요즘에는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것이 문제다. 현재 사회, 특히 대한민국에 집중하여 본다면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만 취하는 어른들이 매우 많다.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할 사법부는 돈과 권력만 있다면 아무리 큰 잘못을 하여도 벌하지 않고, 입법부는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시행, 감독한다. 미디어는 송신되는 콘텐츠의 질적 수준, 언론윤리를 모두 무시한 채 광고 수익을 위해 공장처럼 형편없고 조악한 콘텐츠만 유통한다. 물론 이는 언론사의 총 수익중 95%가 광고수익이기 때문에 생기는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유독 대한민국은 심각한 수준이다. 직장에서는 과도한 집단주의와 권위주의 문화로 인해 무너지게 되는 삶의 균형 또한 삶의 의욕을 저하시킨다. 다시 말해, 이 사회에 보고 배울만한 롤모델이 없다는 뜻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덕적 규범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이들에게 배우는 것은 무력감이다. 저렇게 살아야만 여유 있는 삶,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 생기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급속한 기술의 발전과 유교사상의 충돌이다. 감정표현을 자제하며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고 윗사람에게 공손한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배워온 사람들이 아직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아주 특수하게도 농경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아주 빠른 기간 내에 진입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직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하거나 원하지 않는 다른 직업을 선택하게 되고,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덧붙여 외국 미디어의 유입과 인권신장을 위한 많은 움직임 덕분에 개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급속히 달라진 사회에 이미 적응한 젊은이들과 생활양식, 사고방식 등 여러 가지가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요즘 애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라는 이야기라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이다.
음악,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의 대중문화는 이러한 세대갈등의 확실한 지표다. 20세기 음악과 21세기 음악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세기 음악가들은 대부분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주력했다. 삶과 이야기를 아주 수준 있는 언어와 표현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채웠다. 반면에 2000년에 들어서서는 ‘유행하는 느낌’과 ‘단순한 메세지’가 주력 요소였다. 노래 가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내가 최고야, 널 사랑해’ 이러한 아주 단편적이고 의미 없는 메세지가 대부분이다. 지금 들어도 좋은 옛날 노래들과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 2000년대 노래들의 차이는 바로 ‘의미’다. 예술작품에 의미가 담기지 않는다면 그 시대에 유행했던 피상적인 느낌만 남기 때문에 그 유행이 끝난 시점에서는 다시 듣고 싶지 않아 지는 것이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요즘의 노래들을 보면 생각하게 할 여지가 없는 것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냥 어떤 ‘느낌’, 그것도 아주 단순한 것만 인기를 얻고 있다. 이는 문화시장을 선도하는 젊은이들의 상태와 니즈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트로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10-30대 대중들에게 트로트의 이미지는 ‘웃기다’였다. 사실 식민지배를 했던 원수의 나라의 음악 형식인 엔카를 빌려와 고향 잃은 설움부터 분단의 아픔을 달랬던 아주 슬픈 역사가 담긴 한의 음악이다. 하지만 그 음악의 분위기와 창법이 지금의 그것과는 차이가 다소 존재하기에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어떤 장소에서 트로트가 나오면 웃음바다가 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스터트롯의 등장으로 젊은이들이 이 장르에 익숙해졌고 왜 이런 노래를 우리 어머니, 할아버지, 부장님이 좋아하시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석에 방영되었던 나훈아 콘서트를 통해 그 정점을 찍었다. 오죽하면 이제 젊은이들이 나훈아 콘서트 티켓은 부모님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공감할 수 있는 문화 장르가 하나 만들어진 것이다.
새대갈등을 풀어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해법은 ‘공유 가능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록밴드 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우리나라에서 흥행했을 때 나는 무릎을 쳤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전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상징이 생기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U2, 호주의 AC/DC의 콘서트 영상을 보면 데뷔한 지 40년이 넘은 아주 오래된 밴드임에도 젊은 관객들이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부모님 세대의 아티스트를 자녀들도 함께 공감하며 느낀다는 의미다. 삶의 의미, 환경과 관련된 메세지등 아주 의미 있는 내용이 가득하기 때문에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는 현실의 반영이다. 변화를 통해 아무리 나은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해도 그것을 강제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피상적인 유행만 담는 현재의 문화예술 시장의 행태에서 벗어나 공유 가능한 의미 있는 예술작품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언어 교육과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 예술 활동 지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