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있는 자리 흩트리기>, 김동연

by 맴맴

운명처럼 다가온 책이었다. 보통 책을 고를 때는 서문도 읽고, 뒤표지도 살피고, 어떤 책인지 이리저리 따져보는 편인데, 그날은 그냥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도, 사람도, 나 자신조차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날이었다. 뭐든 확 뒤엎고 싶은 기분. 어지럽히고 싶고, 부수고 싶은 감정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런 날, 아무렇게나 들어간 회사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 『있는 자리 흩트리기』. 제목이 먼저 마음을 건드렸다. 지금 내 상태 같았다. 뭔가가 쌓이고 굳어버린 내 안을 누군가 와서 흩트려줬으면 하는 마음. 그래서 그냥 집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빠가 떠난 뒤, 내 시간은 멈췄다. 바깥세상은 계속 흘러가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몸은 움직였지만 마음은 정지된 상태였다. 모든 게 낯설고 무의미했다. 좋아하던 것들이 다 시들해졌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의미 없이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랬다.


처음엔 자기 계발서겠거니 했다. 혹은 정치인의 흔한 성공담이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우리가 익히 아는 ‘성공’이라는 단어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삶이었다. ‘어떻게 이뤘는가’ 보다는 ‘왜 여기까지 왔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잃고, 부서지고, 다시 일어섰던 시간들. 그 시간 속에서 좀 더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선택하며 꾸려온 인생의 이야기들.


읽으면서 상실한 마음이 공감되고 슬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자리를 흩트리며 역경을 삶의 지렛대 삼아 성장하는 저자가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회사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Make an Imapct'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 젊은이들에게 혹은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또는 죽어서도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생각하는 저자에 감탄했다. 누구를 감동시켜야겠다, 위로해야겠다, 그런 목적조차 느껴지지 않는 솔직한 진심과 의지. 애씀이 느껴져 진하게 마음에 울렸다.


아들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은 내가 감히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연륜 있는 어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아니다. 견디는 사람의 기록이고, 살아내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젊은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인생의 무게가 있고, 우리 부모님께도 조심스레 건네고 싶은 따뜻함이 있다. 아픈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조용한 위로가 되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덕에 어릴 때부터 갖가지 힘든 일을 하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허약한 아이였던 덕분에 운동을 시작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덕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선생이어서 모르면 묻고 배우며 익혔습니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곤에 빠뜨리고,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이것은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길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능히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맹자, 고자장하에 나오는 글>


성공한 사람들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역경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뒤집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겨울 추위가 심할수록 봄의 나뭇잎이 푸르게 마련이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유쾌한 반란은 남이 낸 문제, 내가 낸 문제, 사회가 낸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긴 여정이었다. 있는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흩트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쾌한 반란을 일으키고 성공하려면 내 약점과 실수를 빨리 인정해야 하고, 내 특성과 강점도 잘 파악해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부분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로빈슨 등번호를 모든 구단이 결번시킨 이야기의 압권은 당시 동료선수들에게조차 냉대받았던 한 흑인선수를 50년이 지나서도 기리는 사회 분위기다. 존경받는 인물을 만들어 사회에 희망과 긍정에너지를 불어놓고 생산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를 다하는 사람들을 ‘작은 영웅’으로 기리는 분위기를 만들면 좋겠다.


나를 돌아보는 체크 리스트에는 시간 관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생각,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쓰는 말, 내가 있는 장소도 중요한 체크 포인트들이다. 특히 삶이 꼬이거나 잘 안 풀린다고 생각될 때는 더욱 그렇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중에서


옆에서 많이들 그런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것이라고. 일에 몰두해 잊어보라고. 고마운 위로의 말이긴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자식 대신 나를 가게 해달라고 울부짖어보지 않은 사람, 자식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살마은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란 것을.

떠나보낸 뒤에도 그 아픔을 매일 ‘똑같이’ 느끼는 것이 힘들었다. 아픔을 잘 견디고 있는 ‘척’을 해야 할 때는 더욱 그랬다. 특히 집사람 앞에서는 더 그랬다. 집안 청소를 하다 큰 아이 물건만 봐도 우는 집사람 앞에서는 강인한 척해야 했다. 때로는 나도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서재 책상에 앉아 문을 닫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그 아이는 좋은 곳에 조금 먼저 갔을 뿐이고, 그 뒤를 따라 언젠가 가슴 벅찬 해후를 꼭 하기를.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상 이치에 대한 비밀을 알게 돼서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함께 기뻐하기를. 그 소망으로 남은 생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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