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사회의 조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의기투합, 흠뻑 취해 기분 좋게 헤어졌다. 그리고는 지하철 개찰구에 들어섰는데 정기권을 넣어 둔 지갑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늘 넣어 두는 바지 주머니뿐만 아니라 재킷, 외투, 가방까지 뒤져봐도 없다. 선술집 이자카야 비용은 친구가 계산을 했기에 天仁은 지갑을 꺼내지도 않았다. 어디 빼 두었나? 빠졌나? 전혀 기억이 없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우선 사무실로 되돌아가 여기저기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나와 지나왔던 퇴근 후까지는 분명히 있었다. 술이 꽤 많이 취한 상태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사무실에서 나왔던 이후의 길을 되돌아가본다. 조금 전 친구와 술을 마셨던 이자카야에서는 분실물로 접수된 것이 없다고 한다. 퇴근할 때 야근을 한다는 직원이 있어 음료수와 가라아게(닭튀김)를 사다 주고 친구를 만나라 갔었다. 음료수를 샀던 마트에도 접수된 분실물이 없다고 한다. 가라아게를 판매하는 가게는 이미 문을 닫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스럽다. 잃어버린 지갑은 지하철 정기권을 넣어 다닐 목적으로 쓰는 조그마한 것이다. 비상금 3만 엔, 크레디트카드, 운전 면허증과 도서 대출카드 2장이 들어 있다. 비상금은 카드, 전자화폐로 결제가 되지 않는 식당에서 사용하기 위해 늘 채워두는 것이다.
다행히 가방 안에 비상금이 있으니 당장 귀가 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이 없는 일본에서 신분증명서로도 쓰이는 운전면허증을 재발급해야 할 시간, 비용 등의 수고를 생각하니 관리를 잘못한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사용 기간이 5개월 넘게 남아있는 정기권은 어떻게 되나?
우선, 전화로 크레디트 카드의 분실신고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접수 담당 직원은 오늘 저녁에 사용된 실적은 없다고 한다. 분실신고를 접수 처리 했으니, 잃어버린 카드는 사용이 정지되었고, 새로 발행할 카드는 일주일 후에 받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운전면허증. 분실 신고를 위해 고반(交番, 우리나라의 지구대, 파출소)에 들렀다. 분실 내용을 신고서에 6하원칙에 맞게 적어 달라고 한다. 지갑의 브랜드, 모양, 색상, 내용물 등을 기록해 드렸더니 경찰관이 전산망에 등록하고 접수번호를 준다. 분실물이 접수되었을 경우에만 연락을 해 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본의 공무원, 기업 담장자들은 늘 이런 단서를 단다. 혹시 생길 문제에서 빠져나갈 핑계를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 정말 싫다.
다음은 지하철 정기권. 내년 5월 15일까지 사용할 수 있고, 남은 기간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4만 엔 이상이다. 정기권 분실 경험이 없어 지하철 역 개찰구 담당직원에게 물어본다. 플랫폼 반대편에 있는 사무실에서 정기권 구입 사실이 확인되면 기존 정기권 사용을 정지시키고 접수증을 발행해 준다고 한다. 그 접수증으로 내일 영업시간에 정기권 발행 업무를 하는 긴자(銀座), 아야세(綾瀬) 등 3개 역 정기권 창구에서 수수료 1,020엔을 내고 재발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역 사무실에 들렀다. 신분증은 없었지만 이름, 주소, 핸드폰 등으로 정기권 구입 사실이 확인되어 접수증을 발급받았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있는데 핸드폰으로 모르는 도쿄 시내 유선 번호의 전화가 왔다. 도쿄 경찰청 분실물 센터인데 재류카드(구 외국인등록증)도 분실했는지 물어본다. 天仁과 같은 이름의 재류카드가 접수되었는데 생년월일이 다르기는 하지만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보는 것이라고 한다. 재류카드는 출입국 시 반드시 필요한 신분증명서다. 우리나라도 아닌 일본에서 天仁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살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동명이인이 같은 날 똑같이 뭘 흘리도 다닌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지갑 분실은 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마음은 누군가 현금만 빼 가고, 면허증, 도서 대출카드와 지갑은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 싶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문득 가라아게 판매점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닫아 어제저녁에는 확인하지 못했던 곳이다.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가게 안쪽 사무실에 들렀다 나오는 남자 직원의 손에 비닐봉지에 든 뭔가가 들려있다.
아, 天仁의 지갑이다. “죄송하지만 본인 확인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한다. 물론이다. 내용물, 운전면허증의 기록을 말했더니 사진과도 같다며 돌려준다. 사례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오히려 “찾으러 와 주셔서 고맙고, 전혀 사례를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한다. 어느 손님이 “가게 입구에 떨어져 있었는데, 가게에 들렀던 손님의 지갑인 것 같다”며 맡겼다고 한다. 지갑에 연락처가 없어서 오후 한가한 시간에 경찰 분실물 센터에 맡길 예정이었다고 하니 잘 찾으러 간 것이다. 이 가게에서는 핸드폰에 저장된 야후 페이페이 앱으로 결제를 해서 지갑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빠졌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다.
내친김에 사무실에서 비교적 가까운 가야바쵸(茅場町) 역에 들러 정기권을 재발급받았다. 사용 정지된 정기권을 찾았다고 했더니 기존 정기권의 보증금 5백 엔은 반환되니 재발행 수수료 520엔만 내라고 한다.
사무실로 되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되돌아 올 지갑이었는데 성급하게 카드, 정기권, 면허증 분실 신고를 했던 것일까?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운전면허 시험장에 들러 면허증을 재발행받느라 들 반나절의 시간과 2,250엔의 비용을 더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정말 정말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