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온도_31

by 슬로우

처음 그녀가 '더 슬로우'에 들어왔을 땐 비가 오고 있었다. 비닐우산을 접으며 문을 밀고 들어온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라떼… 아이스로 주세요.”


말끝이 살짝 떨려 있었고, 눈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도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문을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이세윤. 27살,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벌써 세 번째 비정규직 계약직을 돌고 있었다. 이번에도 계약은 6개월이었다.


사내에서 '프리한 감성'을 원한다는 이유로 매번 프로젝트엔 끌려가면서도, 정작 정규직 전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기획 회의에서 아이디어는 늘 '세윤스럽다'며 선택되었지만, 계약 만료가 다가오면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다.


SNS에선 감각적인 포트폴리오로 칭찬을 받지만, 정작 현실은 월급날조차 마감때문에 스트레스로 두근거리는 인생이었다. 자기 자리도, 정체성도 애매한 경계에 놓여 있다는 감각은 그녀를 점점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날, 세윤은 라떼를 받아 들고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우산 끝에 맺힌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봤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신 뒤, 그녀는 백팩에서 노트를 꺼냈다. 노트의 첫 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있지?”


그 문장은 무심하게 적힌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엔 수없이 많은 밤의 고민과 지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다음날도, 그리고 또 며칠 뒤에도 세윤은 종종 커피숍을 찾았다. 처음엔 라떼만 마시고 나가던 그녀는 조금씩 더 오래 머물렀고, 가끔은 이어폰을 낀 채 무언가를 스케치하기도 했다.


도윤은 그녀에게 말을 많이 걸지 않았다. 대신 매번 주문을 받을 때마다 친절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 왜 이름이 ‘더 슬로우’예요?”


도윤은 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웃었다.


“빠른 세상에서 조금 늦게 걸어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세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 좀 좋아요. 요즘은 너무 빨라서 가끔 토할 것 같거든요.”


며칠 뒤, 세윤은 커피를 다 마시고 도윤에게 라떼잔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 계약서 또 새로 썼어요. 3개월 더 연장했어요. 이번에도 ‘성과를 지켜보겠다’는 조건으로요. 답답하고 속상하고 불안한테 딱히 말할 사람도 없어서 그냥 얘기했어요.”


도윤은 잠시 세윤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성과가 아니라, 사람을 먼저 지켜보는 곳이면 좋겠네요.”


그 말에 세윤은 살짝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라떼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커피숍은… 그런 곳 같아요. 사람을 먼저 봐주는 곳.”


그녀는 커피 향이 밴 코트를 걸치며 나갔다. 도윤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속도를 늦추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녀는 지금, 그 연습 중이다.’


며칠 뒤, 세윤은 커피를 다 마신 후에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말없이 고개를 들었고, 도윤은 조용히 다가와 테이블을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사장님, 혹시… 여기서 노트북 켜고 그림 그려도 괜찮을까요?”


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자리는 세윤 씨가 그림 그리는 데 딱 좋을 자리예요.”


세윤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 숨겨둔 안도의 숨결 같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 슬로우’의 구석 자리에서 종종 노트북을 켰다. 회사 일이 아닌, 자신만의 작업을 위한 스케치였다. 브랜딩에 치여 억지로 맞췄던 디자인이 아닌, 정말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그녀는 커피잔 옆에 작은 노트를 펼쳐 두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에게 솔직한 색을 골라보자.’


어느 날, 도윤이 커피를 놓으며 말했다.


“혹시, 이 노트북에 있는 그림들, 나중에 커피숍 벽에 걸어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세윤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가, 잠시 망설이며 물었다.


“진짜요? 이게… 괜찮을까요?”

“괜찮고 말고요. ‘더 슬로우’에 어울리는 그림이거든요. 솔직해서요.”


세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요즘에는요… 그림을 그릴 때마다, 내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기분이에요.”


도윤은 잔잔하게 웃었다.


“그게 진짜 그림이고, 진짜 삶이죠.”


그날, 세윤은 커피숍을 나서며 한참을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휴대폰을 꺼내 ‘더 슬로우’의 외관을 사진으로 담았다.


‘오늘의 사진 한 장. 나를 위한 공간, 내가 나로 숨 쉴 수 있는 곳.’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계약직이고, 특별히 달라진 것 없이 불안했지만, 이 작은 커피숍 안에서 시작된 변화는 분명히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