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할 수 있는 사람, 맡길 수 있는 사람

世音小評 (2025. 5. 26)

by 완서담필

고대 아테네. 인류 역사에서 민주정(民主政)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그 도시도, 정치적 갈등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한 사람은 이성적 절제로 민주정의 형식을 다졌고, 다른 한 사람은 인간적 친밀함으로 대중과 호흡했다. 페리클레스와 키몬.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리더십의 길을 걸었고, 아테네는 그 두 유형 사이에서 방향을 고민해야 했다.


페리클레스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인물로 전해진다. 귀족 가문 출신답게 어딘가 도도한 기품이 있었지만, 쉽게 화를 내는 법은 없었다. 밤늦게 취객이 실수를 해도, 그를 꾸짖는 대신 하인에게 집까지 안전히 데려다 주라 일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설득력 있는 웅변가였으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자기 지지자에게조차 단호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공(公)과 사(私)、를 구분함에 있어서는 신경질적일 만큼 철저했다. 국가는 개인의 금고가 아니며, 재화는 반드시 공적 절차를 거쳐야만 나눠질 수 있다는 원칙. 사적인 인간관계를 배제하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했으며, 결벽증에 가까운 청렴을 정치의 근간으로 삼은 사람. 그것이 페리클레스였다.


그에 맞선 키몬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털털하고 붙임성이 좋으며,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재력도 넉넉했고 인심도 후했다. 막대한 재산을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낌없이 썼다. 자신의 농장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기도 했고, 가난한 이들을 저택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어디를 가든 젊은 시종들의 무리를 데리고 다녔는데, 그들은 길거리에서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돈을 쥐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군사에 능해 아홉 차례나 장군에 선출된 인물. 보스의 기질이 넘쳤던 사람. 그러나 그의 그런 사적 인간관계는 민주정의 리더십과는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그는 사익을 위해 공적 활동을 흔들었고, 사적인 연줄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두 사람의 차이는 단순한 성격의 대비가 아니다. 정치를 구성하는 방식, 공동체를 바라보는 관점, 공적 책임과 사적 정서 사이의 균형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이었다. 이 오래된 두 모델은 오늘날 우리 정치에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지금, 어떤 리더십에 익숙해져 있고, 어떤 정치인을 선택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지 80여 년. 그동안 우리는 키몬형 정치인에게 더 관대해 온 측면이 있다. 후한 인심과 ‘민생을 챙긴다’는 언행, 때로는 보여주기식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을 반기는 유권자들이 적지 않았다. 정치인의 따뜻한 태도와 인간적인 면모에 기대를 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감정이 언제나 공직 수행 능력이나 제도적 책임성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키몬의 인간미에 페리클레스의 절제를 겸비한 인물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그런 인물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우리는 두 유형의 리더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맞이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우선해야 할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마주한 구조적 위기를 돌아보면, 이제는 원칙과 제도 위에 선 정치가가 더욱 절실해 보인다.


시민의 참여와 책임을 토대로 운영되는 정치, 감정보다는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리더십. 그런 인물들은 때로 차갑고 비정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란 사적 호감으로 움직이는 일이 아니다. 공공의 절차를 존중하고, 사적인 연줄 대신 공적 기준을 앞세우는 리더십만이 민주정의 뿌리를 지킬 수 있다. 정치라는 공공재를 다룰 사람을 선택할 때, 우리는 감정보다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2025년 6월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양극화된 정치. 거듭된 탄핵과 거부권, 이어진 비상계엄,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탄핵. 그 모든 혼란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투표함 앞에 서게 되었다. 유권자들은 각 후보의 말투와 표정, 인간적인 면모를 지켜본다. 대표를 뽑는 일은 늘 복합적 판단을 요하는 과정이므로. 인상과 호감도 그 판단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는 공직자로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사적 친밀감보다 공적 원칙을 앞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 없이 이루어진 선택은, 결국 우리 모두의 몫으로 되돌아온다. 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후보자와 그 정당을 바라보는 기준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따뜻함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치의 전부여선 안 된다. 좋아할 수 있는 사람과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다르기 때문이다.


선택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꼭 이번 선거가 아니어도 좋다. 차기든 차차기든, 우리는 늘 다시 선택의 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정치가 우리에게 남기는 얼굴도 달라질 것이다.


2025년 5월 26일

소나리우스의 世音小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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