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화의 기점: 1960년대

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8화>

by 완서담필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제도화되어 왔을까. ‘지편서정’ 제8화에서는 그 출발점으로서의 1960년대 상황을 살펴봅니다. (이 연재는 2025년 7월 3주차부터 주 2회 연재로 전환됩니다. 매주 금요일, 일요일, 두 편의 글을 차례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보다 깊이 있고 풍부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경종이 울리기 시작하고, 대안적 발전 경로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 배경에는 전후 경제 성장에 수반된 공해와 환경 문제의 심각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해와 환경 문제가 잇따라 발생하는 가운데, 인구 증가, 자원 고갈, 핵전쟁, 생태계 파괴에 대한 위기의식도 점차 고조되었다. 물질주의와 경제성장 제일주의, 관료주의와 군국주의로부터의 전환을 요구하는 여론과 사회운동 역시 세계 곳곳에서 확산되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비전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태동하였으며, 이후 점차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서막을 연 것은 두 권의 책이었다. 그중 하나는 1962년에 출간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다. 이 책은 살충제의 과도한 사용이 초래하는 건강과 환경상의 위험을 고발한 것이었다. ‘새들이 울지 않게 된 봄’이라는 뜻의 제목은, 우리 문명에 조용히 다가오고 있던 생태학적 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지구 생태계는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생태계는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인간의 손에 의해 비극적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카슨은 『침묵의 봄』을 통해 전후 사회의 물질주의와 성장 제일주의에 경종을 울렸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환경 의식의 세계적 고양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또 하나는 1969년에 출간된 폴 러프스 에를리히의 『인구폭탄(The Population Bomb)』이다. 이 책에서 에를리히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식량 부족과 환경 악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생물학자의 입에서 나온 이 경고는, 지구 생태계의 수용 능력에 맞추어 정치·경제 시스템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환경사상과 운동에 불을 붙였다. 줄리안 사이먼과 같이 ‘인구폭탄’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한 연구자들도 있었지만, 에를리히의 책은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며 정치 영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후반,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1977–1981)는 에를리히의 학설을 토대로 에너지, 자원, 인구 정책을 수립하였다.


1960년대에는 지금 우리에게 낯익은 환경운동 단체들도 잇따라 등장했다. 1967년 뉴욕에서는 환경 파괴 행위를 상대로 소송 활동을 벌이기 위해 환경방위기금(Environmental Defense Fund)이 설립되었고, 1969년에는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이 결성되어 항의행동과 정책 제안 등 다양한 환경 보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0년 4월 22일에는 미국에서 ‘지구의 날(Earth Day)’ 행사가 처음 열렸으며, 주요 도시에서 열린 다양한 이벤트에는 약 2천만 명이 참여했다. 이후 지구의 날은 해마다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1968년에는 유네스코(UNESCO) 주최로 자원의 이용과 보존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미국 오하이오주 쿠야호가(Cuyahoga) 강에서 심각한 수질오염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고, 인근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환경 규제의 주무 관청으로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이 신설되었고, 국가환경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도 제정되어 대형 공공사업에 대해 환경영향평가를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이 두 제도는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국가들이 환경 규제를 위한 환경법과 행정 체계를 정비하게 되었다.


이 시기, 지금은 동아시아의 환경 선진국으로 일컬어지는 일본에서도 고도경제성장에 수반된 산업공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구마모토현 미나마타만 주변에서는 중추신경계에 이상을 일으키는 미나마타병이 발생했는데, 이는 칫소 미나마타 공장의 아세트알데히드 제조 공정에서 사용된 수은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4년에는 니가타현 아가노강 유역에서도 같은 병이 보고되었다. 한편, 1960년 석유 콤비나트가 건설된 이후 미에현 욧카이치시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천식 환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4년 4월에는 욧카이치시에서 스모그가 3일간 지속되었고, 천식 환자가 사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도야마현 진즈강 유역의 농촌 지역에서는, 약간의 자극에도 병적인 골절이 발생하는 골연화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병은 환자들이 겪는 통증이 극심하여, 사람들은 이를 ‘이타이이타이병(아파아파병)’이라 불렀다. 1966년 9월, 도야마현 특수질병대책위원회는 중앙정부의 후생성 및 문부성의 관련 위원회와 합동 회의를 열고, 이 병의 원인이 진즈강 상류에 위치한 미쓰이금속 가미오카 광업소의 아연·납 광산에서 배출된 카드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기타큐슈시에서 40세 이상 여성 6,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기오염 영향 조사 결과가 공개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고 있음이 밝혀졌다. 위에서 언급한 두 지역의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 그리고 기타큐슈의 대기오염 문제는 일본의 대표적인 산업공해 사례로 묶여, 흔히 ‘4대 공해’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 각지에서는 공해에 반대하는 운동이 확산되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더 이상 이를 외면할 수 없었던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본격적으로 공해 대책 마련에 나서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중앙정부의 후생성 환경위생국 산하에 공해과가 신설되었고, 1967년에는 공해대책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대기오염, 소음, 피해 구제에 관한 법률들이 잇따라 마련되었으며, 도쿄도를 비롯해 독자적인 공해방지 조례를 제정하는 지방정부들도 등장했다. 1970년 11월에는 ‘공해국회’라 불린 임시국회가 소집되었고, 심의 중이던 공해 관련 법안 14건이 모두 가결·성립되었다. 공해보다 경제를 우선시한다는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여론도 고조되었으며, 결국 공해대책기본법에 포함되어 있던 ‘경제의 건전한 발전과의 조화를 도모한다’는 조항은 오해의 소지를 없앤다는 이유로 삭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 시기의 한국은 아직 본격적인 산업화에 접어들기 전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전쟁이 남긴 폐허는 국토 전반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사회 전체에는 절대빈곤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공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이었지만, 1960년대 들어 울산 등을 중심으로 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초기 대응으로는 「공해방지법」 제정(1963), 공해 관련 행정조직의 설치(1967) 등이 있었고, 지리산의 국립공원 지정, 산림 녹화 사업, 자연보호 단체의 탄생 등 환경 보전을 향한 흐름도 함께 시작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환경 혁명의 시기'라고 불리는 1970년대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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