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혁명의 시대: 1970년대

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9화>

by 완서담필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제도화되어 왔을까. ‘지편서정’ 제9화에서는 환경 혁명의 시대로 불리는 1970년대에 주목합니다. (이 연재는 2025년 7월 3주차부터 주 2회 연재로 전환됩니다. 매주 금요일, 일요일, 두 편의 글을 차례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보다 깊이 있고 풍부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197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의식이 한층 높아졌다. 1972년 6월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 인간환경회의(일명 스톡홀름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113개국 정부 대표를 비롯해 400개가 넘는 정부간기구(IGO)와 비정부기구(NGO)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회의 결과 「유엔 인간환경 선언(Declaration of 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he Human Environment)」이 채택되었으며, 이 선언에는 훗날 1987년 브룬트란트 보고서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될 핵심적인 원칙들이 담겨 있었다. 그 주요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류는 진화의 과정에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고, 이는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환경이 파괴되어 이제는 인간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개발은 필요하지만, 그 개발은 반드시 환경 보호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환경은 현재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반드시 보전되어야 한다. 또한 재생 불가능한 자원과 에너지 자원은 합리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며, 그로 인한 이익은 모든 인류가 함께 누려야 한다. 유해 물질의 배출에 있어서도 지구 생태계의 정화 능력을 넘지 않도록 억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실천을 위해 선진국은 먼저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하며, 개발도상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유엔 인간환경 선언」 중에서 발췌·축약)


스톡홀름 회의 이후, 그 합의 사항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국제기구로서 유엔환경계획(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이 설립되었다. UNEP는 유엔 내 관련 기관들과 협력하며, 정보 제공과 사업 기획을 담당하는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해양 오염에 대한 다국간 협력사업, 오존층 보호에 관한 국제조약,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적 합의 형성 등에서 UNEP는 ‘산파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같은 해,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의 도넬라 메도우즈 조교수를 중심으로 한 연구 그룹에 의해 『성장의 한계』가 출판되었다. “지금처럼 자원이 소비되고 환경이 오염되는 상황에서, 과연 지구는 언제까지 인류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로마클럽(Club of Rome)의 이러한 문제 제기를 바탕으로 작성된 연구 보고서였다. 연구진은 수학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방법을 활용해 미래를 예측했다. 그 결론은, 다가오는 100년 안에 경제 성장이 한계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기술 발전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 책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반향은 실로 컸다. 출판 후 단 일주일 만에 미국에서만 2만 부가 매진되었고, “경제·자원·인구에 관한 정책은 지구의 유한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성장의 한계'라는 사고방식은 ‘생존주의(survivalism)’라 불리는 급진적인 정책 패러다임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1973년에 발생한 오일 쇼크는 『성장의 한계』가 던진 경고와 자원 보존을 둘러싼 논쟁에 불을 지폈다. 같은 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오염으로 인한 비용은 오염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오염자 부담 원칙(Polluter-Pays Principle, PPP)'의 도입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시장경제의 가격 시스템 안에 환경적 관심을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이 시기를 전후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정책의 전환을 촉구하는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71년에는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Greenpeace)'가 캐나다에서 결성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린피스는 세계 각지에 지부를 둔 글로벌 환경운동단체로 성장하여, 환경 보호를 위한 항의 행동과 정책 제안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5년에는 민간 연구기관인 '월드워치 연구소(Worldwatch Institute)'가 설립되어, 생존주의의 관점에서 인구, 자원, 식량, 에너지, 지구환경에 관한 조사와 정책 제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0년에는 '국제자연보전연맹(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이 작성한 『세계 보전 전략(World Conservation Strategy)』이 발표되었다. 이 전략은 유엔환경계획(UNEP)의 요청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그 안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같은 해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는 『글로벌 2000 보고서(Global 2000 Report)』를 발표하여, 인구 감축, 자원 보존,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70년대는 훗날 ‘환경 혁명’의 시대로 불리게 된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피해 주민 측이 제기한 여러 건의 공해소송에서 잇따라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1971년 6월의 이타이이타이병 제1차 소송에서는 미쓰이 가미오카 공업소에서 배출된 카드뮴이 주된 원인으로 인정되어 원고 측이 승소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진행된 니가타 미나마타병 소송에서도 쇼와덴코 측의 책임이 인정되어 피해자 주민 측이 승소하였다. 1972년 7월의 요카이치 공해 소송에서는 피고인 6개 회사의 불법 행위가 인정되었다. 1974년 2월의 오사카 공항 소음 문제에 관한 소송에서도 원고 주민들에 대한 손해배상이 인정되었다.


공해 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1년 5월에는 「공해방지사업비 사업자부담법」이 시행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총리부 산하 기관으로 환경청이 설치되어, 그동안 후생성과 통산성에 나뉘어 있던 환경 규제가 일원화되었다. 이후 환경청은 2001년에 한국의 환경부에 해당하는 ‘환경성’으로 승격되었다. 1972년에는 공해소송을 담당하던 변호사들이 전국공해변호단 연락회의를 결성하였으며, 이 조직은 지역별로 흩어져 있던 공해소송의 흐름을 수평적으로 연결하고 네트워크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자연환경보전법」이 공포되었다.


1973년에는 공해 건강피해 보상법안이 각의(閣議, 한국의 국무회의에 해당)에서 결정되었고, 10월에는 화학물질의 심사 및 제조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도 공포되었다. 1974년 11월에는 도쿄에서 합성세제 퇴출 전국집회가 열렸다. 환경청의 수질 조사에서는 호수의 70%, 하천의 40%가 오염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듬해에는 국토의 80%와 해안선의 40%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1976년 12월에는 승용차에 대한 배기가스 규제가 도입되었으며, 이 규제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기준이 채택되었다.


1977년 5월에는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호(교토 인근)에서 대규모 적조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산염을 함유한 합성세제를 사용하지 말고 천연비누를 사용하자는 시민운동, 이른바 ‘비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79년 6월에는 공해연구위원회 및 공해변호사연락회의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일본환경회의가 학회 조직으로 발족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시가현에서 비와호 부영양화 방지 조례가 가결되었다. 한편, 대규모 개발사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사전에 평가하고 조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환경영향평가법안은 산업계와 관련 부처의 반대로 인해 5년 연속 국회에 제출되지 못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도 이러한 규제 반대 흐름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경우, 1960년대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공해에 대한 초기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정책이 추진되면서 환경오염은 더욱 심각해졌다. 정부는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국민들 또한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발전의 상징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 대기와 수질의 오염 수준은 점차 높아졌고, 기형 물고기의 출현, 농작물의 고사, 주민 건강 피해 등 구체적인 사례들이 전국적으로 보고되었다. 특히 울산, 여천, 마산 등 주요 산업지역에서는 오염 피해가 누적되면서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공해는 일상적 불편을 넘어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이 고조되던 1970년대, 한국은 유신체제라는 비민주적인 정치 질서 아래 놓여 있었다. 공해나 환경 문제를 정부에 자유롭게 제기하기 어려운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도, 심각해지는 오염 현실은 정부 스스로도 외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공해방지법 개정과 환경보전법 제정을 포함한 법·제도 정비가 이루어졌고, 환경 행정 조직도 점차 확대되었다. 동시에 국립공원 지정, 자연 보호 헌장 선포, 산림 녹화 사업 등 다양한 보전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중 산림 녹화는 정부가 기획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관민 협력’ 방식으로 전개되었지만, 실제로는 정부 주도의 동원형 정책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은 장기적으로 울창한 산림 복원의 성과를 낳으며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환경권에 대한 인식도 점차 확산되었고, 피해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반공해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환경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민간 차원의 자연 보호 활동도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는, 환경 정책 면에서는 후퇴의 시기로 평가되기도 하는 1980년대의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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