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10화>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제도화되어 왔을까. ‘지편서정’ 제10화에서는 퇴조와 이행의 기로에 놓였던 1980년대의 풍경을 살펴봅니다.
1980년대에는 지구환경 문제에 관한 국제적인 틀이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했다. 1982년에는 유엔 해양법조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영해 및 배타적 경제수역의 범위가 규정되었다. 연안국은 자국의 주권이 미치는 수역에서 해양 보호의 의무를 지는 한편, 공해 및 심해저의 오염 방지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게 되었다. 또한 유엔 세계자연헌장(United Nations World Charter for Nature)도 채택되었는데, “인류에게 가치가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며, 우리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원칙이 헌장에 명시되었다.
1985년에는 남극의 오존홀을 촬영한 이미지가 공개되면서, 세계적으로 오존층 보호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같은 해, 세계기상기구(WMO), 유엔환경계획(UNEP), 국제학술연합회(ICSU)는 공동으로 “인위적으로 배출된 이산화탄소에 의해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결과 심각한 기후변화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1986년에는 구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원자로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탈원전 여론과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1987년에는 오존층 보호와 프레온 가스 규제를 명시한 몬트리올 의정서가 채택되었으며, 같은 해 국제연합의 브룬트란트 보고서도 발표되어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에 전 세계의 주목이 집중되었다(브룬트란트 보고서에 관해서는 이 연재의 제2화를 참조). 1988년에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이 설립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수백 명의 과학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 조직은, 기후변화에 관한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정책결정자들에게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권고를 정기적으로 제시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1992년, ‘지속 가능한 발전’의 실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세계가 함께 머리를 맞댄 ‘리우 지구정상회의(Rio Earth Summit)’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삼으며, 지구 차원의 환경정책이 제도적 기반을 갖춰 가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한편, 1980년대는, 1970년대의 환경개혁 흐름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이데올로기가 세계 곳곳에서 득세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규제 완화와 시장 자율의 논리가 정치·경제의 중심 담론으로 자리 잡으면서, 환경정책 역시 후퇴하거나 변형되는 경향을 보였다. 정책 수단에서도 직접 규제가 꺼려지며, 기업의 자율적인 활동에 맡기는 방식이 선호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에서 환경 정책의 후퇴가 두드러졌다.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1981~1989)은, 민주당 지미 카터 정권 시기의 생존주의적 정책 기조를 강하게 비판하며, 규제 완화와 경제 성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환경보호청(EPA)의 반성장주의자들을 방치하면, 우리는 모두 토끼나 새처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인식이 백악관을 지배했고, 이에 따라 EPA의 인력과 예산 역시 대폭 삭감되었다.
이 점에서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제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공해 대책을 추진한다는 ‘조화론적’ 관점은, 1970년의 ‘공해국회’를 거치며 폐기된 듯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명분 아래 경제성장 제일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염물질의 배출 총량에 상한선을 두는 방식인 ‘총량 규제’에 대해, 당시 집권 자민당은 이를 고정배출원에 적용하는 데 반대 입장을 보였다. 여당의 정책 책임자는 “환경청은 필요 없다”는 발언을 통해 그러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환경청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환경청이 검토 중이던 환경영향평가 제도 역시 경제 단체와 통산성(현 경제산업성)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법안 제출조차 하지 못했다. 해당 법안은 1981년 4월이 되어서야 겨우 국회에 제출되었지만, 3년간의 심의 끝에 중의원이 해산되며 자동 폐기되었다. 환경영향평가법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97년 6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정되었다.
한편, 풀뿌리 수준에서는 다양한 환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81년 5월, 전국 37개 공해환자 단체가 모여 ‘전국공해환자연합회’가 결성되었고, 1982년 2월에는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를 둘러싸고 지역 주민들이 야간비행 금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도쿄 서부의 베드타운인 아키시마, 후사, 타치카와 지역 주민들이 요코타 공군기지의 항공기 소음을 중지하라는 요구와 함께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1985년 11월, 와카야마현 다나베시에서는 시민단체가 덴진자키 숲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매입하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나섰다. 1986년 8월에는 홋카이도 자연보호단체연맹이 시레토코 원시림의 벌채 중지를 촉구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지구환경과 대기오염을 생각하는 전국시민회의’(CASA)가 발족했다.
1980년대의 한국은 신군부에 의한 권위주의 체제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정치적 자유는 크게 제약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3저(저달러, 저금리, 저유가)’ 호황에 힘입어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중화학공업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에 달했고, 중산층을 중심으로 소득과 소비가 늘어나면서 자가용 보유율도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산업화 과정에서 누적된 환경오염이 공해의 형태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82년에는 비철금속 공업단지인 울산 온산공단 지역에서 중금속 폐수와 대기오염으로 인해 이른바 ‘온산병’이라 불리는 집단 건강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는 한국 사회 최초의 집단 공해병 사례로 보도되었다. 4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의 수질오염은 식수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을 키웠고, 1989년에는 수돗물에서 중금속과 발암물질이 검출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기오염 문제도 심각했는데, 화석연료 사용의 증가에 따른 산성비 문제와 자동차 보급 확대에 따른 광화학 스모그 현상으로 인해 호흡기 질환이 확산되었다. 산업 및 생활폐기물의 배출량이 급증하면서 위생매립지 조성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한편으로는, 국제 환경정책의 흐름에 부응해 국내 제도적 기반도 차츰 정비되기 시작했다. 1980년 개정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는 환경권 조항이 새롭게 명시되었고, 1982년에는 환경영향평가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1987년부터 민간 개발사업에도 적용되며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1983년에는 환경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사업장에 대해 부과금을 매기는 배출부과금 제도가 시행되었고, 1986년에는 폐기물관리법이 새로 제정되었다. 이어 1989년에는 수질환경기준이 강화되면서, COD(화학적 산소 요구량)와 질소, 인이 새롭게 규제 항목으로 포함되었다. 또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어 하수처리시설이 확충되고 악취 규제 조치가 병행되었다. 1990년 1월에는 보건사회부 산하에 설치되었던 환경청이 국무총리 산하의 환경처로 승격되며 행정적 위상이 높아졌다.
다음 글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국제정치의 주요 의제로 자리 잡아 가던 1990년대의 흐름을 짚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