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화와 제도화: 1990년대

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11화>

by 완서담필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제도화되어 왔을까. ‘지편서정’ 제11화에서는 그 정책 패러다임이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1990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둘러싼 국제적 논의와 제도화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는 ‘환경과 개발에 관한 유엔 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가 개최되었다. 178개국의 정부 대표단과 114개국의 정상 및 정부 수반, 그리고 7,900개 이상의 민간 단체가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장기적 비전과 실행계획을 담은 ‘아젠다 21(Agenda 21)’이 채택되었고,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침이 국제적으로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모니터링하기 위한 기구로 유엔 산하에 ‘지속가능발전위원회’(Commission on Sustainable Development)가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각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 사이에서도,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그 이행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리우 회의에서는 생물다양성 보호와 기후변화 방지를 위한 두 개의 국제 협약이 체결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제 협약 체계는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97년 11월에는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회의(COP3)가 일본 교토에서 개최되었고, 그 자리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구체적 조치를 담은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가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선진국들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5년을 제1차 공약기간으로 설정하고,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여섯 가지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감축하기로 합의하였다. 유럽연합(EU)은 1990년 대비 8% 감축, 일본은 6% 감축을 약속했으며, 당시 최대 배출국이었던 미국도 7% 감축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이유로 국제사회의 비판 속에 교토의정서에서 탈퇴하였다. 다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도 개발도상국이라는 이유로 감축 의무에서 제외된 중국에 대한 불만 역시 미국의 이탈 배경 중 하나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유전자변형작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 GMOs)에 대한 우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1998년, 유럽연합(EU)은 북미산 GMO의 수입을 금지했고, 재배한 작물에서 씨앗을 얻을 수 없도록 유전자가 조작된 이른바 ‘자살 씨앗’에 대해서는 개발도상국 농민들 사이에서 반대 운동이 퍼져나갔다. 1999년에는 금융·경제 정보 기업 다우존스(Dow Jones & Company, Inc.)가 ‘지속 가능성 지수’를 발표하였다. 이 지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목표를 경영 전략에 통합한 기업을 평가하고, 그에 대한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듬해인 2000년, 유엔은 새천년 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s)를 채택했다. 빈곤 퇴치, 초등교육 보급, 성평등 증진, 유아 사망률 감소, 산모 건강 개선, 에이즈·말라리아 예방, 환경적 지속 가능성 확보, 개발도상국에 대한 글로벌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적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MDGs는 2015년 종료되었고, 그해 9월에는 이를 계승하는 새로운 목표로서 유엔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가 채택되었다. 이 시기를 계기로, 지속 가능한 발전은 ‘실천 목표’와 ‘기한’이라는 관리 가능한 언어로 번역되며, 정부와 자치단체, 기업, 교육 등 각 분야의 정책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제도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3년 11월에는 환경에 대한 부담이 적은 건전한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하는 환경기본법이 공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가와사키시를 비롯한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관점에서 환경계획과 '지방의제21(Local Agenda 21)'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국가 차원의 제1차 ‘환경기본계획’이 국무회의(각의)를 통해 채택되었다. 1995년 1월에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했고, 붕괴된 건물에서 발생한 석면 노출 문제가 큰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지진을 계기로 자원봉사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1998년 6월 ‘특정비영리활동촉진법(NPO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에는 ‘지구온난화대책본부’가 설치되고, ‘지구온난화대책추진대강’이 수립되었다. 이어 2000년 6월에는 ‘순환형사회형성추진기본법’이 공포되었으며, 이 법에서는 폐기물 발생의 억제, 자원의 순환적 이용과 적정한 처분, 천연자원 소비의 절감, 환경 부담의 저감 등이 국가의 중점 정책 과제로 명시되었다.


일본에서는 환경과 생활을 지키기 위한 시선에서, 국가가 추진하는 사업의 타당성을 시민 스스로 묻는 주민투표 운동이 각지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96년 1월, 니가타현 마키정에서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 정리·축소를 둘러싼 현민투표가 이루어졌다. 1997년에는 6월 기후현 미타케정에서 산업폐기물 처리장 건설 문제를, 12월에는 오키나와현 나고시에서 미군 해상기지 건설 문제를 두고 주민투표가 진행되었다. 이어 2000년 1월에는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에서 요시노강 가동보 건설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환경을 둘러싼 갈등이 더 이상 전문가나 행정의 문제로만 남지 않고, 시민 스스로의 삶의 문제로 재구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주민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시민의 자기결정권과 민주적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뚜렷하게 높아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변화이기도 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환경 이슈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환경 문제는 물론, 정권과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집단적 항의 자체가 쉽지 않았고, 저항 세력 내부에서도 ‘반독재·민주화’라는 거대 담론이 다른 정치적 의제를 압도하던 분위기가 있었다. 6월 항쟁과 민주화 선언 이후, 막혀 있던 둑이 터지듯 억눌렸던 환경 문제가 빠르게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했다. ‘녹색연합’, ‘환경운동연합’ 등 조직적이고 전문성을 갖춘 시민단체들도 결성되어, 민간 차원에서 환경 문제를 감시하고 이를 정치적 의제로 끌어올리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빠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체제가 남긴 깊은 사회적 비용이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는 대형 오염 사건들도 잇따라 발생했다. 1980년대 말, 서울 수돗물에서 발암 물질이 검출되면서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고조된 가운데, 1993년에는 서울시 상수도에서 대장균과 일반세균이 기준치를 초과해 검출되었다. 문제는 서울에만 그치지 않았다. 1991년과 1994년에는 낙동강에서 페놀 원액이 유출되는 등 유해 물질 배출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고, 한강 이외의 수계에서도 물고기 떼죽음 현상이 이어지며 수질 오염이 전국적 사회 이슈로 부상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집중된 수도권에서는 ‘쓰레기 대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폐기물 처리 문제가 심각한 과제로 떠올랐다. 1992년에는 김포 매립지 조성을 둘러싸고 운영 주체와 지역 주민 간의 갈등이 첨예해졌고, 1995년에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를 위한 핵폐기장 후보지가 발표되자, 녹색연합과 환경운동연합이 본격적인 반대 운동에 나섰다. 같은 시기, 새만금과 시화호 간척 사업, 그리고 동강댐 건설을 둘러싼 갈등도 사회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다른 한편, 1990년 8월에는 환경정책기본법을 비롯한 이른바 ‘환경 6법’이 시행되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정책 패러다임이 환경 법제와 행정의 기본 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환경개선비용부담법이 제정되어, 폐기물 예치금 제도, 부담금 제도, 환경마크 제도 등 경제적 수단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1992년에는 리우 회의를 계기로, 유해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야생 동식물의 국제 거래, 해양 폐기물, 기후변화, 생물다양성에 관한 국제 협약에 잇따라 가입하는 한편, 자원재활용촉진법, 환경영향평가법, 폐기물처리시설설치촉진법 등 관련 법률도 새로 마련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공해 산업을 여전히 수입하고 있던 한국이 자국 내 오염물질 배출 기업의 해외 이전과 함께 공해 수출국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다음 글에서는 2000년대를 기점으로 나타난 변화의 흐름을 짚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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