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24화>
분배 정의라는 고전적 주제 역시 지속 가능한 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구의 부양 능력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 자원과 에너지 소비의 증가에 의존한 경제 성장은 끝없이 이어질 수 없다. 따라서 그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는 자원의 재배분과 부의 재분배, 그리고 효율 개선을 통해서만 대응할 수 있다. 『지편서정』 제6화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논의는 주로 빈곤과 격차의 문제와 연결되어 다루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빈곤은 경제의 실패로 여겨져 왔다. 소득과 임금이 부족해 기본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상황, 이것이 빈곤 문제의 본질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빈곤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결국 경제 성장이다. 곧 발전이란 1인당 GDP의 증가를 의미하게 된다. 이런 사고는 경제학과 사회학의 근대화론으로 집약되었다. 근대화론에 따르면 전통사회는 서구의 선진 공업국과 같은 길을 걸어 시장경제, 공업화,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기반한 ‘근대사회’로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근대화’가 곧 발전이며, 동시에 빈곤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빈곤을 잠재 능력과 자유의 상실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Amartya Kumar Sen)에 따르면, 빈곤은 잠재 능력에 대한 제약이자,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실질적 자유의 부재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자유란 단순히 억압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잠재 능력을 실현하고 삶의 기회를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를 뜻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빈곤의 본질은 경제 성장의 성패가 아니라, 잠재 능력과 그 실현 가능성으로 정의되는 자유에서 드러나는 불평등과 불공정의 문제다. 따라서 발전의 정의와 평가 기준 역시 GDP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잠재 능력을 반영하는 종합적 지표 체계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인간개발지수(HDI)’는 생산과 소비의 양적 확대가 아니라 건강, 교육, 주거, 위생, 환경적 지속 가능성, 인간 안보, 평등과 같은 항목을 통해 발전을 포착한다. 2001년에 채택된 유엔의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2015년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역시 HDI의 사고를 계승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브룬트란트 보고서로 대표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구상은 경제 성장의 필요성을 결코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고서는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경제 성장은 지속 가능한 발전에 필수적이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개발도상국의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선진 공업국의 경제도 성장해야 한다”라고까지 밝히고 있다. 다만 보고서가 말하는 경제 성장은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한다. 하나는 빈곤의 철폐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적 지속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브룬트란트 보고서가 요구하는 경제 성장은 빈곤 철폐를 통한 기본적 욕구 충족이라는 사회적 공평성을 위한 성장인 동시에,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도 양립 가능한 성장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상과 그 실현 가능성을 두고는 지금도 견해가 엇갈린다.
분명한 사실은, 경제 성장이 목적 그 자체이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것이든, 분배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윤리적으로 선할 뿐 아니라 실제 삶의 질에서도 더 나은 사회라는 점이다. 예컨대 경제가 성장하고 있음에도 빈곤과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사회라면, 누구도 그것을 선한 사회나 살기 좋은 사회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은 통계적으로도 입증되어 왔다. 유엔의 데이터를 활용한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 의 연구에 따르면, 소득 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평균 수명, 아동 학력, 유아 사망률, 살인 발생률, 수감률, 성인병, 사회적 유동성 등 여러 지표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다. 반대로 적극적 복지 정책을 통해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다. 동일한 국가 안에서도 격차가 큰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사이에서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요컨대 소득 격차가 작을수록 앞서 언급한 문제들이 완화된다. 더욱이 격차 축소의 혜택은 저소득층만이 아니라 고소득층도 함께 누릴 수 있다.
실제로 북유럽 국가와 같은 복지국가는 소득 격차와 경쟁이 치열한 미국과 같은 나라에 비해 건강 문제나 사회 문제가 덜 심각하다. 윌킨슨은 그 이유를 복지국가의 격차 시정 정책,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지위 불안과 스트레스의 경감 효과에서 찾는다. 복지국가는 시장경제에 기초하면서도, 어떤 이유로든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생존권을 사회 전체가 보장하는 국가다. 복지 서비스는 익명의 사회적 연대에 의해 떠받쳐지며, 자선적 선의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로 제공된다. 이러한 복지국가는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의 위험과 비용을 사회 전체가 분담한다. 따라서 복지 정책이 충실한 나라일수록 사회적 지위에 관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복지국가가 건강과 사회 문제, 나아가 경제적 성과에서도 높은 수준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결국 지속 가능한 발전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복합적인 정책 통합의 과정이다. 경제적 목표에 환경적 목표를 통합하고, 그 안에서 공평성과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속 가능한 발전의 핵심이다. 물론 이러한 정책 통합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올바른 정보와 지식, 그리고 정치적 의지가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이어질 몇 차례의 글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정책 통합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되는 독일을 다룰 것입니다. 환경정치, 다시 말해 환경을 위한 정치라는 관점에서 그 경험을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