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25화>
2002년, 독일 연방정부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국가전략(National Sustainable Development Strategy, 이하 NSDS)’을 수립했다. 이 전략은 단순히 환경정책에 관한 장기 계획이 아니라 국가의 주요 정책 전반에 지속가능성의 원리를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그 내용적 성격을 보더라도, 독일의 NSDS는 지금까지 살펴본 정책통합의 실현을 지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우선 이러한 정책통합적 국가전략이 수립되기까지의 독일 정치적 맥락을 간략히 개관하고자 한다.
독일에서 ‘환경정책’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69년 무렵이었다. 같은 해 환경청(UBA)이 설치되었지만, 주요 임무는 연구와 정부 자문에 한정되었다. 당시 환경 관련 정책은 내무성이 관할했고, 에너지정책은 경제성이, 원자력정책은 연구기술성이 각각 담당했다. 정책 입안 권한은 오히려 주(州) 정부가 더 컸다. 주 정부는 사업자에 대한 인허가권을 지니고 있었기에 산업계나 연방정부의 개발정책을 견제할 수 있었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 유치나 지구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운동의 영향도 있어 지방자치단체가 연방정부보다 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1972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이 개정되어 대기오염, 폐기물, 소음에 관한 정책 입안 권한이 연방정부로 이관되었다. 이어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계기로 환경·자연보호 및 원자로 안전을 전담하는 연방행정기관으로서 환경부(BMU)가 창설되었다.
1970년대 독일에서는 명령·통제(command and control)형 환경정책이 주류를 이루었다. 행정기관은 인허가권을 지렛대 삼아 산업계에 규제와 지도를 가했다. 이 시기에는 ‘예방원칙(precautionary principle)’, 즉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더라도 회복 불가능한 환경 피해가 우려될 경우, 예방적 관점에서 사전에 대응해야 한다”는 사고가 등장했다. 기술 발전에 맞춰 환경규제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재설정하는 제도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책이 계획대로 집행되지 않는 ‘수행 결함(implementation deficit)’ 문제가 나타났다. 경제적 악영향을 우려해 현장에서 규제가 무력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에서도 경제적 정책수단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이르자, 급진적 입장의 녹색당조차 환경세와 같은 경제적 수단이 온실가스 감축에 효과적이라고 보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계와 보수 정당은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환경세 도입에 강하게 반대했고, 대신 감축 목표와 방법을 스스로 정하는 자율적 방식을 선호했다. 한편 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생태적 근대화(ecological modernization, EM)’라는 사고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EM 논의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화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라 할 수 없었다. 근대화란 문제 해결 능력에서의 진보, 즉 패러다임 전환과 더불어 문제 해결을 담당하는 새로운 기술, 정치·사회, 과학·문화의 차원이 제도화되고 분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의 근대화는 생태 문제를 외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야기해 왔다. EM론자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러한 근대화는 근대화가 아니라 ‘근대라는 이름을 붙인 시스템의 경화증’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생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근대화는 미완의 프로젝트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EM론자들은 기술적·제도적 혁신을 통해 기존의 근대화 과정을 생태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의 영향으로 “생태적 근대화는 경제적으로도 이익이 된다”, “생태적 근대화를 통해 환경과 경제는 양립할 수 있다”는 사고가 확산되었다. 『지편서정』 제21화에서 살펴본 지속가능성 담론의 선진국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이 담론은 이윤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산업계 행위자들을 설득하는 데 유용하고 효과적이었다.
독일은 환경운동의 힘 또한 강한 나라였다. 그 핵심은 반핵운동에 있었다. 정부의 원전 건설 계획은 대규모 시위와 소송의 대상이 되었고, 핵연료 재처리 시설 건설 계획도 격렬한 항의 끝에 중단되었다. 이러한 반핵운동을 통해 환경단체는 원외 정치의 최전선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전후 환경운동은 전체주의 나치 정권하의 자연보호 운동과는 뚜렷이 구별되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지편서정』 제14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환경운동을 배경으로 독일 녹색당이 탄생했다. 녹색당은 지방정치에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1983년에는 연방의회(Bundestag)에 진출했으며, 1998년 총선 이후에는 사회민주당과 함께 적녹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적녹연립정부 아래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과 관련해 중요한 정책 전환이 이루어졌다. 탄소세가 도입되었고, 재생에너지에 유리한 고정가격매입제도도 시행되었으며, 탈원전에 관한 사회적 합의도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기도 했다. 산업계는 탄소세, 탈원전, 재생에너지 우대제도의 도입에 반대했으며, 경제성장을 통한 고용 확보를 중시하는 사회민주당도 산업계에 우호적이었다. 그 결과 녹색당은 타협을 강요받았다.
탄소세는 도입되었지만 시행 초기에는 에너지 집약적 산업에 대한 과세가 면제되었다. 세수의 상당 부분은 실업수당, 종업원 연금, 건강보험 지출 등 기업의 간접 인건비를 줄이는 데 사용되었다. 탈원전은 원자로 수명을 기준으로 장기적·단계적으로 추진되었고, 조기 폐쇄 시 잔여 수명 연수를 다른 원자로에 더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또한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아 중단되었던 핵폐기물 수송도 재개되었다.
적녹연립정부 성립 이후 NSDS 수립 논의도 본격화되었다. 녹색당은 전략 수립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에너지 정책을 포함한 개별 정책에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0년 6월에는 총리실 산하에 NSDS 수립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각 부처 실무 책임자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그린 내각(Green Cabinet)’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린 내각은 부처 간 협의를 통해 NSDS 초안 작성에 착수했다. 아울러 민간 각 분야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이하 SD위원회)도 설치되어, 그린 내각에 조언을 제공하는 동시에 사회 각 부문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사회와의 대화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병행되었다. 일반 시민과 관련 단체는 인터넷을 통해 정부 초안에 의견을 제출할 수 있었고, 정책 담당자와의 토론도 가능했다. 이렇게 제기된 의견은 검토 과정을 거쳐 초안에 반영되었다. 예컨대 지속가능한 발전을 ‘세대 간 형평, 삶의 질 향상, 사회적 결속, 국제적 기여’라는 네 가지 목표로 규정하는 관점은 사회와의 대화를 통해 더욱 뚜렷해졌다. 다양한 사회단체와의 대화도 진전되었다. 종교단체는 형평성, 연대, 가족의 가치를 중시해 달라고 요청했고, 환경단체는 기후보호와 관련한 수치 목표의 명기를 요구했으며, 경제단체는 국제적 감각과 경쟁력 강화를 주문했다. 이러한 의견은 모두 NSDS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02년, 「독일의 전망―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우리의 전략―」이라는 제목의 NSDS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독일의 수립 시기는 늦은 편이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 같은 계획 자체에 대한 정부 내 회의적 분위기였다. 사실 독일 정부는 1970년대에도 정책통합을 염두에 둔 환경계획을 마련한 적이 있었지만, 부처 간 대립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또 다른 원인은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부족이었다. 2000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를 알고 있는 사람은 13%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에 NSDS 수립을 강하게 요구한 주체는 환경단체와 지방자치단체였다. 특히 각 주 환경장관으로 구성된 환경장관회의는 연방정부에 NSDS 수립을 서둘러 달라고 거듭 촉구했다.
수립 시기는 늦었지만, 내용 면에서 독일의 NSDS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른 많은 나라와 달리 수립 과정과 내용이 정책통합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EU의 환경정책통합 보고서는 독일 NSDS를 부문 간 정책통합의 모범적 시도로 높이 평가했다. 선진국의 NSDS 수립 과정을 비교 분석한 OECD 보고서 역시 독일의 사례를 환경정책통합의 대표적 사례로 다루고 있다. 환경정치학 분야에서도 독일 NSDS는 『지편서정』 제22화에서 살펴본 수평적 환경정책통합의 중요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독일 지속가능발전 전략의 정책통합적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