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적 지배체제로서의 민주주의

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32화>

by 완서담필


다수의 동의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는 현대 정치에서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주의는 환경적 지속가능성이라는 목표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정치의 방향을 생각할 때, 이 물음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민주주의론의 역사는 오래되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기준을 사용하여 정치체제를 분류했다. 첫째는 통치자의 수, 즉 통치하는 자가 한 사람인가, 소수의 집단인가, 다수인가 하는 기준이다. 둘째는 통치의 질, 즉 그것이 선한 통치인가 아니면 부패한 통치인가 하는 기준이다. 그가 말한 선한 통치란 통치자의 수와 관계없이 인민 전체의 이익을 위한 통치를 의미한다. 반면 부패한 통치란 권력이 사적으로 이용되어 통치자의 사익을 위한 자의적 지배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 두 기준을 조합하면 정치체제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군주정은 한 사람의 군주에 의해 선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체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군주정이 타락하면,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폭군에 의한 전제정으로 변질된다. 한편 귀족정은 소수의 뛰어난 인물들에 의해 수행되는 선한 통치를 뜻한다. 이때의 ‘귀족’이라는 말은 세습 귀족이라기보다 용기 있고 훌륭한, 즉 가장 뛰어난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귀족정이 타락하면 과두정으로 바뀐다. 과두정에서는 소수의 실력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패한 통치를 행한다. 한편 폴리테이아는 다수에 의한 선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치체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폴리테이아는 오늘날의 이상적인 민주주의 체제와 닮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이 폴리테이아가 타락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민주정으로 변한다. 그가 말한 민주정이란 다수자인 민중이 선동가에 휘둘려 정치적으로 폭주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에 의한 선한 통치, 즉 폴리테이아를 최상의 정체로 보았다. 그는 일종의 집단적 지성에 신뢰를 두고 있었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여러 사람이 비용을 나누어 정성껏 준비한 향연이 한 부유한 사람이 마련한 향연보다 더 훌륭할 가능성이 높다. 음악이나 시에 대한 평론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면 한 사람 혹은 소수 평론가의 판단보다 풍부한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족 출신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당시의 아테네 민주정은 변덕스럽고 비합리적인 군중심리에 휘둘리는 ‘중우정’으로 비쳤다. 그럼에도 그는 소수의 뛰어난 자에 의한 통치보다 다수의 시민에 의한 통치가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사고방식은 근대 민주주의 사상에도 계승되었다.


한편 현대 정치학, 특히 비교정치학에서는 정치체제를 민주주의 체제와 비민주주의 체제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체제(democratic regimes)는 R.A. 달(Dahl)이 정식화한 ‘폴리아키(polyarchy, 다원적 지배체제)’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달은 이상적 민주주의에 가장 근접한 현실의 정치체제를 폴리아키라 불렀다. 폴리아키란 단순히 다수가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라, 공적인 이의 제기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시민 누구에게나 정치 참여의 기회가 열려 있는 체제를 뜻한다. 이러한 다원적 지배체제에서는 시민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다양한 집단이 경쟁과 협력을 통해 권력을 분산시킨다. 그러나 달이 지적했듯이, 대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질 경우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실질적 평등이 훼손될 위험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 시민혁명 이후의 프랑스·영국·미국과 전후의 독일·일본 등에 나타난 정치체제가 이러한 폴리아키, 즉 일반적인 의미의 민주주의 체제로 분류된다.


비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다시 전체주의 체제(totalitarian regimes)와 권위주의 체제(authoritarian regimes)로 나뉜다. 전체주의 체제는 사회 구성원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부정되는 체제이다. 국가에 대한 저항이나 불복종은 용납되지 않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따른 감시와 처벌이 일상화되어 있다. 개인의 사상과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국가의 통제 아래 놓인다. 당연히 정당 간의 다원적 경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주의 정치체제의 전형적인 예는 1920~30년대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독일 나치 정권, 그리고 구소련의 스탈린 정권이다. 이러한 전체주의의 통치 방식은 조지 오웰(Orwell)의 반유토피아 소설 『1984』에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하나의 비민주주의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이다. 전체주의와 달리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한 대대적인 국민 동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한적이나마 정당 간 경쟁도 허용된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와 참여는 크게 제약되며, 야당이나 시민사회의 민주화 요구는 정권에 의해 억압된다. 예를 들어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등장한 군부 정권들은 경제성장과 반공을 명분으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시행했다. 한국의 유신체제를 비롯해 ‘개발독재’로 불린 이러한 군부 정권들은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현대 정치학에서는 비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정치발전의 징표로 본다. 새뮤얼 P. 헌팅턴(Huntington)에 따르면, 비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정치적 변화에는 세 번의 큰 ‘민주화의 물결’이 있었다. 제1의 민주화 물결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 프랑스, 영국에서 발생했다. 제2의 물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 이탈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베네수엘라 등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3의 물결은 1970~80년대에 그리스,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까지 밀려왔다. 물론 이 세 물결의 사이사이에는 권위주의로의 회귀도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의 흐름은 계속 확산되어, 1980년대 후반에는 구소련과 동유럽에서, 21세기에 들어서는 중동 지역에서도 새로운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상에서 살펴본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근대 정치사와 현대 정치학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해 왔다. 그와 동시에, 환경운동과 환경정치학의 시야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관점에서 이러한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을 새롭게 성찰하려는 논의가 이어져 왔다. 민주주의의 원리가 환경적 지속가능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혹은 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둘러싸고 오랜 논쟁이 이어져 온 것이다. 다원적 지배체제로서의 민주주의 체제는 지속 가능한 발전에 방해가 되는가, 아니면 도움이 되는가?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지속 가능한 발전의 관계를, 민주주의 한계론과 옹호론의 두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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