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33화>
민주주의 체제, 즉 다원적 민주주의 정치체제(이하 민주주의로 표기)가 지속 가능한 발전의 핵심 원리인 환경적 지속가능성과 양립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둘러싸고는 오랫동안 한계론과 옹호론이 대립해 왔다. 이하에서는 환경정치학 분야의 주요 논의를 중심으로 두 입장의 핵심 논점을 포괄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민주주의 한계론자들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환경보호 사이에는 이론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의 보호, 경제활동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주의에서는 정부가 필요한 규제를 시행하기가 쉽지 않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부의 경제 개입이 경제활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불가피하다. 이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환경규제나 시장 개입이 제약을 받기 쉽다.
둘째,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이익집단의 정치활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이익집단은 정치인, 정당, 정책 엘리트에게 조직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며, 자신들의 특수한 이해를 공공정책에 반영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주로 기업단체, 노동조합, 농업단체 등 생산자 집단이다. 이들은 경제성장과 개발에서 정부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자금력과 조직력, 정보력, 정치적 네트워크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환경보호보다 생산과 개발, 경제성장이 우선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셋째,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관련된 문제는 매우 복잡하며, 적절한 대응에는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아마추어리즘’ 위에 성립한 체제다. 유권자뿐 아니라 선거로 선출되는 정치가들 대부분은 환경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다. 경제활동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규제보다 개발을 장려하는 정책이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주의 한계론자들은 민주주의 체제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의 양립은 어렵다고 본다. 오히려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더 적합한 것은 비민주주의 체제라고 주장한다.
반면 민주주의 옹호론자들은 이러한 한계론을 비판한다. 녹색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녹색 정치세력은 민주주의야말로 환경적 지속가능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체제라고 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보다도 환경적 지속가능성 이전의 문제로서, 비민주주의 체제는 ‘좋은 정치체제’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자연보호에 힘을 쏟기도 했던 나치 정권은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잔혹한 정권이었다. 나치는 1935년 ‘제국자연보호법’을 제정하는 동시에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통해 유대인을 차별하고, 이듬해에는 4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그 결과 나치의 인종주의와 침략전쟁은 용납할 수 없는 반인도적 학살과 환경파괴를 초래했다.
둘째, 더구나 환경사학자 프랑크 우케터(F. Uekoetter)가 지적하듯, 자연보호는 전체주의 나치 정권의 발명품도 아니었다. 나치 이전부터 산업화와 도시화가 초래한 환경변화로 인해 유럽 각국은 이미 자연보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나치의 자연보호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행정기관들이 법의 규정을 무시하는 것을 방관했다. 나치와 협력한 자연보호주의자들도 나치 이념에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협력했을 뿐이었다.
셋째, 환경문제와 같은 복잡한 사안의 해결에 적합한 것은 비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정보공개, 광범위한 참여, 다양한 대안의 제시, 자유로운 토론 등 민주적 정책결정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이러한 절차가 부재하다. 정부나 기업에 불리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고, 주민의 항의는 억압되며, 언론통제로 문제 자체가 은폐된다. 실제로 1970년대 이후 공해나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민주주의 국가들이었다. 비민주주의 정권들은 심각한 환경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환경운동을 탄압하고 그 존재를 숨겼다.
넷째, 한계론자들은 권위주의 체제의 장점으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든다. 그러나 빠른 결정이 반드시 좋은 결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밀실에서 졸속으로 결정된 공공사업이 지역 주민의 반대운동으로 좌절되고, 정부에 대한 불신만 커지는 경우가 많다. 만약 정책 초기 단계에서 여러 대안이 제시되고 시민 참여를 통한 숙의 과정이 보장되었다면, 더 나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정책일수록 공익에 부합하고 실현 가능성도 높다.
다섯째,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일은 곧 공익을 지키는 일이다. 공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권력에 맞서 비판과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민주주의 체제는 이러한 ‘시민’을 길러내지 못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비판적인 시민이 아니라 권력에 복종하는 ‘신민’이다. 표현,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체제야말로 공익에 민감한 시민이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이다.
옹호론이 제시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오늘날의 환경운동 세력 역시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더 깊고 넓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한계론이 지적하듯, 민주주의와 환경적 지속가능성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비민주주의 체제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오히려 자유로운 비판과 포괄적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 체제에서는 공익으로서의 환경적 지속가능성이 실현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 논쟁을 통해 민주주의 역시 환경과 생태의 차원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과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이론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더 깊이 진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 흐름이다. 하나는 민주주의 이론의 ‘숙의적 전환’이며, 다른 하나는 ‘생태학적 전환’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논쟁을 통해 얻은 교훈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방향성에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