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론의 숙의적 전환

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34화>

by 완서담필


‘민주주의론의 숙의적 전환’이란 민주주의의 기초를 광범위한 참여와 토론, 그리고 숙의(熟議, deliberation)에 두려는 이론적 흐름을 말한다. 이러한 민주주의를 정치학에서는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라고 부른다.


환경정치학자이자 숙의민주주의 연구자인 드라이젝(J. S. Dryzek)에 따르면, 정책 과제가 복잡할수록 숙의민주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예컨대 환경문제는 그 인과관계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개발의 필요성과 환경보호를 둘러싸고 다양한 입장이 대립한다. 인과관계의 복잡성에 더해 이해관계와 가치관의 다양성까지 겹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보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책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드라이젝을 비롯한 숙의민주주의 이론가들은 경쟁이나 단순한 다수결이 아니라, 광범위한 참여에 기반한 토론과 숙의의 과정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다양한 관점에서 자유롭게 의견이 제시되고, 여러 대안들에 대해 사회적 토론과 숙의가 충분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특정 이익에 치우치지 않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숙의민주주의에서 숙의의 주체는 통상 말하는 전문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숙의민주주의의 정책결정 과정에서는 전문가의 전문지식과 시민의 지역적 지식(local knowledge)이 동등하게 논의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댐 건설이 예정된 지역의 주민은 하천공학이나 토목공학의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생활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지혜를 지니고 있다. 숙의민주주의론에 따르면 이러한 지역적 지식은 문제를 보다 깊이 분석하고 적절한 대응을 마련하는 데 유용하다. 이처럼 숙의민주주의는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가로지르는 집단적 지성에 민주주의의 토대를 두려는 시도이다. 이 점에서 숙의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책결정 과정은 전문가만의 토론에 의존하는 과학적 실증주의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고 급진적이다.


많은 환경운동가들은 숙의민주주의가 환경보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환경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녹색당도 강령 속에 하향식이 아닌 밑으로부터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해반대운동이나 환경운동은 정보공개와 계획과정에의 주민참여를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또한 주민 반대에 부딪힌 대규모 공공사업은 대개 ‘개발’이라는 결론이 이미 정해진 채 비공개적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계획의 초기 단계부터 폭넓은 참여와 숙의의 과정을 거친다면, 개발의 목적과 환경보호의 목표를 조화시킬 수 있는 어떤 대안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는 환경운동 전반에 널리 공유되어 있다.


숙의민주주의의 대표적 실천 방식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컨센서스 회의(consensus conference)’이다. 이는 찬반이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무작위로 선정된 비전문 일반인들로 구성된 시민패널을 조직하고, 이 패널이 숙의를 거쳐 합의를 도출하는 방법이다. 시민패널은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면서 토론과 숙의의 과정을 거쳐 패널로서의 공동 입장을 표명한다. 합의된 의견은 ‘합의문서’로 정리되어 언론을 통해 널리 공개된다. 이 문서는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시민패널이 숙의한 결과물로서, 하나의 숙의된 여론으로서의 무게를 지닌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정치인이나 정책결정 집단이 그 결과를 전혀 무시하기는 어렵다. 컨센서스 회의는 1980년대 덴마크에서 유전자조작기술 등 새로운 과학기술의 사회적 타당성을 다각도로 평가하는 제도로 제도화되었으며,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활용되고 있다.


또 다른 숙의민주주의적 방법으로 ‘토론형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가 있다. 일반적인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는 여론은 반드시 숙고된 의견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그것은 정보조작이나 인상조작의 영향을 받은 편향된 의견들의 단순한 산술적 총합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토론형 여론조사는 무작위로 선정된 조사대상자에게 학습과 토론, 숙의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여론조사의 신뢰성과 타당성을 높이려는 방법이다. 통상 두 차례에 걸쳐 여론조사가 진행되는데, 1차 조사와 2차 조사 사이에 참여자들이 숙의할 수 있는 기간을 둔다. 그 기간 동안 참가자들은 전문가 강연, 그룹 토론, 전체 회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접한다. 그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이렇게 토론형 여론조사는 숙의의 결과로서의 여론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미국 대학 연구자들에 의해 고안된 이 방법은 1994년 영국에서 처음 시행된 이후 18개국 이상에서 70회 이상 실시되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도 정부 주도로 에너지정책에 관한 토론형 여론조사가 시행된 바 있으며, 한국에서도 신고리 5·6호기 건설 여부를 둘러싼 공론화 과정에서 토론형 여론조사가 실시되어, 그 결과가 실제 정책 결정에 반영된 바 있다.


숙의민주주의 이론에 따르면 숙의의 과정을 거치면 사람들의 의견은 보다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게 된다. 환경적 지속가능성이라는 공공이익 역시 마찬가지다. 사업의 목적, 경제성, 환경영향 등에 관한 올바른 정보와 숙의의 기회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환경 영향을 최소화하는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숙의의 효과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숙의의 과정은 다양한 왜곡의 힘에 노출될 수 있으며, 법적 구속력이 없는 한 숙의 결과가 그대로 정책에 반영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의민주주의의 의의는 크다. 성장과 개발이 최우선 명령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숙의민주주의는 ‘환경적 지속가능성’이라는 공공이익을 사회적으로 제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이자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보다 급진적인 생태학적 관점에서 전개된 민주주의론의 쟁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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