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36화>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만큼, 그 의미는 모호해진 것도 사실이다. 환경정책의 구호로, 기업의 홍보 문구로, 혹은 국제기구의 전략 용어로 사용되면서 이 개념은 점점 더 많은 의미를 품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지속 가능한 발전은 경쟁적이며 다의적인 개념이다. 그 안에는 기술적 개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도,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접근도 공존한다. 바로 이 다의성 속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정치적 잠재력은 시험받고 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정당화하는 담론으로 머물 수도 있고, 새로운 사회 변화를 이끄는 언어 동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약한 지속 가능성(weak sustainable development)’과 ‘강한 지속 가능성(strong sustainable development)’의 구분이다. 전자인 약한 지속 가능성은 구조적 개혁보다 기술적 수단에 의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다. 환경적 지속 가능성 역시 인간 복지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논리가 우세하다. 반대로 강한 지속 가능성에서는 지구 생태계의 수용 한계를 넘지 않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된다. 이 경우 자연은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보호받아야 할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간주된다. 물론 두 입장 사이에는 다양한 중간 영역이 존재한다. 지속 가능성의 강도를 나타내는 선 위에서 약한 쪽으로 갈수록 현상 타파의 의미는 옅어지고, 강한 쪽으로 갈수록 그 의미는 점점 급진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한편, ‘형평성(equity)’이라는 차원 역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다의성을 확대하는 요인이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브룬트란트 보고서에 나타난 세대 간 형평성, 즉 미래 세대의 필요를 해치지 않으면서 현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세대 내 형평성으로, 환경 파괴의 피해가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되는 불평등을 문제시하는 관점이다. 이는 제한된 공유재로서의 자원을 부유한 국가들이 선점하고 소비해 온 데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부유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의 공해 수출이나 국경을 넘는 환경오염 같은 지리적 차원의 불평등 문제도 존재한다. 또한 형평성은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참여 문제와도 관련된다. 저소득층, 개발도상국, 원주민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의 장에 닿기 어려운 현실은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이상과 상충하며, 이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형평성의 의미가 달라짐에 따라 지속 가능한 발전의 해석 또한 미묘하게 달라진다.
흥미로운 점은,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사회경제적 평등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성격을 분류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빌 홉우드(Bill Hopwood) 등은 지속 가능한 발전의 담론을 크게 ‘현상 유지(status quo)’, ‘개량(reform)’, ‘변혁(transformation)’의 세 영역으로 구분했다.
현상 유지의 영역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 언급되지만 실질적 대책은 거의 마련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전형적인 예는 신자유주의적 지속 가능성 담론이다. 여기서 ‘지속 가능한 발전’은 사실상 ‘지속적 개발’이나 ‘지속적 경제성장’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자유의 개념은 기업의 자유로 이해되고, 부의 재분배는 자유의 침해로 간주된다. 그 결과 복지와 환경 정책은 후퇴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은 정치적 수사에 머무른다. 세계은행이나 OECD가 자주 이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자리한다. 결국 이런 담론은 현상 유지로 귀결되며,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평등의 의미는 무력화된다.
개량의 영역에서는 현상 타파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대책이 점진적 개혁 수준에 머무른다.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환경적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대응의 필요성도 널리 공유된다. 또한 기본적 필요의 평등한 충족이라는 관념에도 비교적 관대하다. 그러나 실제 대책은 효율성 향상 같은 점진적 수단에 머무르고, 가치관이나 정치경제 체제의 근본적 변혁은 후순위로 밀린다. 세제 개혁이나 가격 메커니즘 조정 같은 조치가 급진적이라 여겨질 정도다. 브룬트란트 보고서를 포함한 주류 환경단체의 논의가 여기에 속한다.
가장 급진적인 영역은 변혁이다. 여기서의 변혁은 기본적 필요의 평등한 충족과 환경적 지속 가능성의 증진을 위해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사상이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의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이다. 북친에 따르면 불평등과 환경 파괴의 근원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위계적 지배 관계에 있다. 따라서 빈곤과 환경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인간 상호 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의 위계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그 위에서 소규모의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 사이에 수평적 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 자연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지속 가능한 삶은 이러한 새로운 사회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생태주의자들은 이런 사회야말로 진정한 지속 가능한 사회라 말한다. 이는 브룬트란트 보고서가 보여준 개량적 접근과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의성의 지평은 지속 가능한 발전의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최소한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의미가 점점 형식화되고 보수화되는 길이다. 존 드라이젝(John S. Dryzek) 의 분석이 보여주듯(제21화 참조), 지속 가능한 발전은 본래 급진적 사상이 아니다. 브룬트란트 보고서로 대표되는 지속 가능성 담론은 오히려 개량주의적이다. 생태중심주의 관점에서 보면 브룬트란트 보고서는 성장주의와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에 불과하다. 경제 성장의 ‘질’을 바꿀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지구의 수용력 한계나 성장의 한계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은 이런 지속 가능성 논의를 현상 유지를 위한 정치적 수사로 보며, 오히려 진정한 지속 가능성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단순한 말장난으로 형해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그 반대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의미가 보다 급진적으로 해석되는 방향이다. 경제학자 허먼 데일리(Herman E. Daly) 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생태학적으로 유지 가능한 발전’으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양적 성장이 없는 발전, 곧 ‘정상(定常, steady-state)경제’로의 이행을 뜻한다. 정상경제란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는 더 이상 늘지 않지만, 삶의 질을 높이는 혁신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경제”다. 그는 지구의 부양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효율성 개선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자원과 에너지 소비 총량을 줄이고, 그에 따른 문제를 재분배와 효율 개선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의미가 한층 더 급진적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보수화의 가능성과 급진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의 문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단지 선언적 구호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이끄는 힘이 될 것인가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독일 등에서 나타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정치가 현실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