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에 흔히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농담이 있다. 처음 들으면 웃음이 나오지만, 은퇴 후의 삶을 살아보니 그 말이 단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현직에서 물러난 후 어찌 보면 오히려 더 바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다 보면 나이에 따라 각기 다른 인생 주기를 경험하게 된다. 내가 살아본 생각으로 인생은 15년을 주기로 변화하고 성숙해 간다는 생각을 한다. 유년의 성장과 감정 발달, 청년의 독립과 자기 탐색, 중년의 내적 성장과 사회적 기여, 그리고 60대 이후의 지혜와 성찰까지. 지금 나는 인생 후반전의 문턱을 넘어 또 다른 삶의 여정인 은퇴 시기에 접어들어 살고 있다.
은퇴는 흔히 생각하듯 물러남이나 끝남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우라 나라에서 조경받는 원로 학자가 얘기한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는 65세에서 75세였다고 했던 말도 이제는 비로소 이해가 된다. 현직에서 일할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활동과 모임, 교류들이 오히려 은퇴 후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난처한 일이 있었다. 스마트폰 일정표에 꼼꼼하게 적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해외 나가는 일정이 겹쳐버린 것이다. 오랜 직장 동료들과의 해외 골프 투어와 가족, 지인과의 해외일정이 같은 날짜로 중복된 것을 뒤늦게 알았다.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회비도 선납한 동료들과의 일정은 변경이 불가능했고, 가족과 지인의 일정을 어렵사리 조정하여 가까스로 난감한 상황과 비용손실을 최소한 막았다. 결국 항공권 변경 수수료로 40만 원의 비용을 내가 부담했지만, 더 큰 손실과 지인들에게 실수를 최소화로 일이 마무리가 되었다는 데 안도해야 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친한 친구가 있다. 그는 은퇴 후 골프와 여행 등 다양한 모임을 진행하다 일정이 겹쳐 해외여행 항공권과 예약했던 호텔을 모두 취소하며 상당한 금전적 손실과 함께 여러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가졌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더욱 일정 관리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한 의사 선배가 "퇴직 후 골프 멤버 한 팀이 있다는 건 신의 축복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현직에 있을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은퇴를 해 보니, 그 말이 얼마나 맞는 얘긴지 실감한다. 은퇴 후 골프 모임 하나를 주선하려 해도 쉽지 않다. 시간과 돈, 건강, 취미, 그리고 배우자의 허락까지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은퇴자들이 골프 대신에 둘레길 걷기나 당구 같은 간편한 취미를 더 선호한다.
"인생이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있다. 은퇴 후에도 인생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며 건강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은퇴 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람과의 약속이나 모임이 차츰차츰 줄어든다. 건강상의 이유나 개개인의 삶이 점차 재정비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에 맞춰 편안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면서, 마음이 맞는 이웃들과 교류하고 함께 운동과 취미생활을 즐기며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은퇴 후의 이상적인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모든 이웃이 내게 딱 맞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 상대에게 맞추며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좋은 관계가 만들어진다. 나는 사람을 만나 교류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년 몇 차례 만나는 모임부터, 월례 모임, 취미 모임, 즉석 번개 모임까지 다양한 모임 속에 나의 일상들이 채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바쁘게 살다 보면 약속이 중복되는 실수를 할 때도 있다. 예전에는 좀처럼 이런 일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나 순발력이 예전 같지 않고,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경험을 가끔 한 번씩 한다. 어느 날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종업원이 "어르신 도와드릴까요?" 하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속으로 멈칫 놀란다.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느낄 때마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고 했던가. 이제는 나의 나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지혜와 여유로움을 찾아가며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슬기로운 은퇴생활을 위해 오늘도 나는 조금 더 온화하게, 조금 더 여유롭게 살아가려 노력을 한다.